“그럼 이따가 봐.”
“응.”
유키무라의 목소리가 유래 없이 경쾌하다. 반비례로 내 목소리는 추욱 가라앉았지만.
자신이 테니스하는 모습을 봐주지 않을 거냐며, 오빠가 동생에게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 기회조차 주지 않을 거냐며 릿카이에, 정확히는 테니스부에 놀러오라는 유키무라의 끈질긴 설.득.에 결국 넘어가고 말았다.
효테이에서 출발한다고 유키무라에게 전화를 한 뒤 서둘러 릿카이로 향했다. 내가 늦으면 늦을수록 고생하는 건 테니스부 부원들일 테니까.
릿카이대 부속중학교
정문에 도착해 힐끗 교패를 확인한 뒤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리고 도착을 알리기 위해 휴대폰을 꺼내는 순간,
“란.”
“으힉―!”
톡톡, 어깨를 두드리며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휴대폰을 손에 움켜쥐고 요상한 소리를 내며 굳어 버렸다.
“쿡쿡.”
“오, 오빠?!”
“슬슬 도착할 때가 된 것 같아서 마중 나왔어.”
“아, 응. 고마워.”
생각하고 미리 마중을 나온 유키무라의 배려는 고맙지만 기왕 친절을 발휘하는 거 조금 더 상대를 배려해주면 좋으련만. 유키무라의 답지 않은 장난에 조금 불퉁한 표정으로 인사를 했더니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유키무라의 웃음이 진해졌다.
한 손으로는 내 가방을 받아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은 유키무라가 테니스 코트로 향하며 릿카이에 대한 안내로 포장된 릿카이 자랑을 시작했다. 덕분에 테니스 코트로 가는 길이 조금 늦어지는 것 같았지만 내가 릿카이에 흥미를 가지길 바라는 유키무라 인만큼 설명은 나름 재미있었다.
가볍게 산책하듯 교정을 둘러보다 보니 어느 순간 사람들이 모여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크게 다가왔다. 우리를 발견한 순간 잠시 잦아드는가 싶었던 그 소리는 유키무라의 손을 잡은 내가 테니스부로 들어서자마자 귀가 아플 정도로 커졌다. 그 소리에 놀라 나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자 유키무라가 가볍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란은 인상을 써도 예쁘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이 더 어울려.’라는 말과 함께.
그와 동시에 주변이 고요해졌지만 마치 여자 친구에게 할 법한 대사를 동생에게 이야기하는 유키무라 덕분에 당황한 나는 미처 그걸 깨닫지 못했다.
사나다와 야나기를 필두로 레귤러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레귤러들에게 나를 소개하는 유키무라의 표정이 상당히 미묘했지만 내 정신건강을 고려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마도 평소와 달랐을 유키무라의 기세에 레귤러를 비롯하여 일반 부원들도 잔뜩 기합이 들어 연습에 임하는 게 눈에 훤히 들어왔다.
원작이 현실의 테니스와 동떨어져 있는 만큼 초반에는 나름 관심을 가지고 연습을 구경했지만 워낙 운동에 관심이 없는데다 테니스 룰을 제대로 알지 못하다보니 호기심은 금세 지루함으로 바뀌었다. 어느덧 유키무라와 사나다가 시합을 시작했는지 코트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유키무라에게 파이팅을 외쳐주는 것으로 경기에 집중하고 있음을 보여준 뒤 슬쩍 펜스 바깥으로 눈을 돌려 꺅꺅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응원을 하고 있는 여아들을 바라봤다. 올망졸망한 아이들을 보고 ‘허허, 좋을 때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잠시, 모여 있는 아이들 사이로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아 있는 한 여학생이 눈에 들어왔다 사라졌다.
“응……?”
무리지은 아이들의 움직임에 따라 아른아른 보이는 모습을 제대로 확인하려 몸을 움직였지만 코트를 체인지하는 유키무라에 의해 나는 다시 유키무라와 사나다가 시합을 하는 코트에 눈을 고정시킬 수밖에 없었다. 오빠의 시합이 재미없냐는, 그러니까 결국은 자신의 시합에 집중하라는 유키무라의 애정 어린 잔소리를 덤으로 들으며.
얼핏 보였던 인영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다시 눈을 돌렸을 때의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어 계속 곁눈질을 하며 시합이 끝나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사나다와의 시합을 산뜻하게 마무리 한 유키무라에게 온갖 입에 발린 칭찬을 늘어놓은 뒤 재빨리 확인했을 때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분명 아는 사람 같았는데. 직접 얼굴을 본 적은 없지만 트위터에서 잠시나마 사진을 보았던 하루님과 닮은 사람이 벤치에 앉아 있는 걸 본 것 같았지만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찰나의 희망은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은 나로 인해 유키무라의 기분까지 덩달아 저조해지는 게 보였지만, 생각보다 큰 상실감에 유키무라에게 제대로 웃어주지 못했다. 깜짝 이벤트 같았던 릿카이 방문 후 평소와 다름없는 날들이 지나갔다.
점점 더 강해지는 태양의 열기만큼 테니스부 부원들의 열정도 커져만 가던 여름의 어느 날, 유키무라가 다시 쓰러졌다.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인데도, 수술을 통해 완쾌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순간 내려앉는 마음과 초조함을 감출 수 없어 연락을 받자마자 학교를 조퇴하고 카나이 종합병원으로 향했다. 한 시간 남짓 걸리는 시간에 마음은 더욱 조급해져 내가 왜 릿카이가 아닌 효테이로 왔을까 하는 원망이 들었다.
나중에 보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어머니의 만류를 뒤로 하고 병실을 확인하고 뛰어 올라갔다. 조용히 노크를 하고 문을 열었을 때 유키무라는 침대에 앉아 달력을 바라보고 있었다. 지난 일요일은, 관동대회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오빠.”
“오빠가 또 란에게 걱정을 끼쳤네?”
이제 겨우 중3 밖에 되지 않았으면서. 고작 15살이면서. 유키무라가 나를 위로하려 들었다. 울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언제나처럼 미소 짓는 유키무라를 보자니 마구 속이 상했다. 저 바보 같은 유키무라는, 남들에게 마왕이라고 불리는 유키무라는, 결국 평범한 중학교 3학년의 남학생인 것이다. 다만 남들보다 조금 더 의젓하고, 조금 더 책임감이 강한 것 뿐.
눈물을 참으려 애를 써보지만 의지를 무시하고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병실 문 앞에서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보는 유키무라의 미소가 얼핏 이지러져 보였다. 그 얼굴을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숙였을 때 어느새 침대에서 내려온 유키무라가 다가와 가만히 나를 안아주었다. 그 다정함이 도화선이 되어 더는 눈물을 참으려는 노력조차 할 수 없었다.
“내 동생, 울보였구나.”
겨우 울음을 그쳐가는 와중에 들려온 유키무라의 한 마디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이게 만들었다. 물론 내가 잘 우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조막막한(!) 유키무라 앞에서 펑펑 울어버리다니. 이번엔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효테이와 카나가와를 매일 왕복했다.
무리하는 것 아니냐며, 위험하다며, 내가 매일 병원에 오는 것을 말리는 유키무라였지만 그 내심은 기뻐보였다. 그래서 매일 전화로, 문자로, 메일로 연락을 하고 방과 후엔 어김없이 병원을 찾았다. 그리고 드디어, 유키무라가 수술을 결심했다.
쉽지 않은 결정에 드물게도 흔들리는 유키무라가 보였다. 아니, 사실 이게 당연한 것인데 내가 그동안 너무 유키무라의 과보호에 익숙해졌나 보다. 사실은 내가 유키무라를 이해하고 보듬어줬어야 하는데.
“오빠.”
“응?”
“고마워.”
애정을 가득 담아, 내가 지을 수 있는 최대한으로 큰 웃음을 지으며 인사했다. 그리고 그대로 다가가 유키무라를 힘껏, 껴안았다.
“세이이치 오빠가, 내 오빠라서 정말 기뻐.”
평소와 다른 느닷없는 애정표현에 유키무라가 느릿하게 팔을 들어, 그렇지만 강한 힘으로 마주 안아 왔다. 이내 내게 시선을 맞춘 유키무라는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의 바람을 이야기했다.
“란. 내 대신 관동대회를 지켜봐주지 않을래?”
“…….”
“란이 봐준다면 레귤러들도 더 힘이 날거야.”
세이슌을 이기지 못한다는 걸 알고 있는 테니스 시합보다 수술이 무사히 끝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유키무라의 수술을 기다리는 것이 내게는 더 중요했다. 하지만 유키무라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응!”
기꺼운 마음으로 유키무라의 부탁을 받아들이자. 그가 안심할 수 있도록.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는 내 대답에 유키무라의 얼굴이 한결 편안해졌다.
7월 27일, 예정된 유키무라의 수술일이 돌아왔다. 그와 함께 관동대회 결승전도. 시합은 원작과 한 치의 오차 없이 진행되었고 그건 유키무라의 수술도 마찬가지였다. 씁쓸함과 안도감이 동시에 밀려들었다. 그런 내 표정을 바라본 유키무라는 가만히 손을 들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힘든 것은 유키무라일 텐데 정작 위로를 받는 것은 나였다. 그에 또 미안하고 울 것 같은 기분이 들어 고개를 돌려 유키무라를 외면했다.
“우리 예쁜 동생님이 뭐 때문에 이렇게 우울하실까.”
생긋. 그 자체로 빛나는 ―심지어 오늘 수술을 받았다고는 믿을 수 없는― 미소를 지으며 유키무라의 시선이 침대 옆으로 오지 못하고 문 앞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레귤러들을 향했다. 단체로 ‘움찔’하는 소리가 들리는 기분이었다.
“오, 오빠! 피곤하지 않아?!”
그러니까 이제 쉬어야지 않겠냐는 의미를 담아 간절하게 유키무라를 바라봤다.
“모두들 오늘 고생했어.”
아주 잠깐 짓궂은 표정을 지었던 유키무라는 곧 부드럽지만 단아한 미소를 지으며 레귤러 한 명, 한 명과 시선을 마주했다. 어떤 반론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한 유키무라의 표정에 레귤러들이 쭈뼛쭈뼛 인사를 하며 병실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나에게도 피곤하지 않냐며 집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는 유키무라였지만 어쩐지 그대로 돌아가면 안 될 것 같았다.
“오빠랑 좀 더 같이 있을래.”
머뭇머뭇, 하지만 확실하게 내 의사를 전하자 어쩔 수 없다는 듯 유키무라가 미소 지었다.
슬쩍 눈치를 보며 오늘 시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약간의 투덜거림을 섞어. 하지만 다들 노력했고 멋있었다며 유키무라에게 열심히 변명했다. 속으로는 내가 왜 이래야 하는 가에 대해 의문을 가지며. 그리고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 같다.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내 이야기에 호응해주던 유키무라의 얼굴이 점점 희미해졌다.
툭―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관동대회가 끝나고 유키무라의 수술 결과를 확인하자 긴장이 풀려 대화 도중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나 보다.
“오빠……?”
눈을 비비며 어느새 입에 붙은 호칭으로 유키무라를 불러보지만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이상한 느낌에 주위를 둘러보니 익숙한, 그러나 지금의 나에게는 매우 낯설게 느껴지는 자취방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 한 권. 나를 깨운 소리의 원인인 책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도로 눈을 감고 가시오」
“지금 이게…… 꿈이었다고……?”
호접지몽胡蝶之夢이라는 사자성어가 이렇게 와 닿을 줄이야. 바닥에 떨어져있는 책이 지금 일의 원인이라도 되는 양 한참을 노려보다 지그시 눈꺼풀을 내리눌렀다. 다시 눈을 뜨고 싶지 않은 마음을 다독이며 억지로 눈을 떠 앞을 확인했지만 변하는 건 없었다. 유키무라의 병실에 남지 않고 레귤러들과 함께 돌아갔다면 나는 계속 ‘유키무라 란’이었을까……?
덧1. 유키무라가 란에게 ‘란은 인상을 써도 예쁘지만 그래도 웃는 모습이 더 어울려.’라고 말하며 갤러리들을 향해 스산한 표정을 지으며 어떤 제스처를 취해서 주변이 조용해졌다는 거 안 비밀.
덧2. 레귤러들에게 란을 소개하는 유키무라의 표정이 미묘했던 이유가 아무리 레귤러들이라지만 자신의 소.중.한. 동생을 소개하려니 뭔가 못마땅한 감정이 들어서였다는 것도 안 비밀.
덧3. 2012/4/5 새벽, 청연 양과의 대화 중
서율 : 청연, 란이 릿카이 테니스부 구경을 갔잖아. 거기서 유키무라가 멋있는 모습을 보여주려고(?) 자기도 시합을 하는데, 그게 누구랑 하는 게 좋을까?
청연 : 억; 사.. 사나다?
서율 : 오케이. 비주얼적으로도 차이가 있는데다 의욕만땅의 유키무라를 받아주기에는 사나다가 괜찮겠다. 사나다에게 잠시 묵념.
청연 : 묵념; 미안해;;;;;
서율 : 지못미 닭군
청연 : 아니 뭐, 진짜 의욕만땅 유키무라를 상대하려면 사나가다 아니면; 렌지는.. 렌지는 좀;
서율 : 아마 적당히 피하지 않을까? 렌지라면
청연 : ㅎㅎ;; 뭐랄까, 삼강의 한 축이긴 한데 사실 렌지가 얼마나 강한지는 모르겠어;
이래서 사나다 당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