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테니스의 왕자 효테이학원 온리이벤트 빙제시대氷帝時代’에 나왔던 오오토리 드림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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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ay

 

written by 서율

 

 

#1 D-2 기다림

 

겨울학기가 얼마 남지 않은 2, 변화를 앞둔 학교는 어수선하기 마련이었다. 효테이 역시 비슷했지만 올해는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아토베가 1학년 때부터 부장을 맡으며 실력을 키워온 테니스부는 올해 그 어느 때보다도 우수했고 실력뿐 아니라 외모도 마찬가지였다, 그에 비례해 테니스부의 인기도 절정을 달렸다.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있는 테니스부 레귤러는 대부분 3학년이었고, 그들이 대거 졸업을 앞두고 있는 지금이 고백을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테니스부 레귤러들에게 고백을 준비하는 것만으로도 잔뜩 들떠있는 여자 아이들의 설렘, 반대로 중학교 졸업을 앞두고 좋아하는 여자 아이에게 혹은 그게 아니더라도 누군가에게 고백을 받으면 기쁠 것이 분명한 남자 아이들의 기대가 어우러져 효테이를 맴돌았다.

 

물론 대부분의 학생들은 그대로 같은 재단인 효테이 고등학교로 진학하겠지만, 좋아하는 상대의 졸업과 톱니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이어지는 밸런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라는 이벤트는 사춘기 소년, 소녀들의 감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밸런타인데이의 고백, 화이트데이의 화답. 그리고 졸업식에서의 교복 두 번째 단추, 새 학기와 함께 시작되는 핑크빛 연애소년, 소녀들의 행복한 상상은 카푸치노 위의 몽실몽실한 우유 거품처럼 부드럽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소녀들에게 행복한 상상을 안겨주는 존재 중 한 명이지만 정작 본인은 그 분위기에 편승하지 못하고 있는 한 사람이 있었으니…….

 

 

새 학기를 앞두고는 늘 있는 일이었다. 특히나 겨울에서 봄으로 넘어가는 시기가 가장 바쁘다는 것은 지난 경험으로 오오토리 역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가슴에 와 닿는 것을 일치시키기란 쉽지 않았다.

 

후우.”

 

벌써 몇 차례 내뱉는 한숨인지. 모 학교의 데이터맨들이 있었다면 정확한 수치를 계산해 주었겠지만 아쉽게도 이곳은 효테이였다. 한숨에서 알 수 있듯 오오토리는 오늘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해 주변 이들의 의아함을 자아냈다. 그러나 평소의 착실함이 빛을 발한 덕분에 선생님과 학우들은 친절하게도 졸업시즌이 다가오면서 오오토리가 테니스부 선배들과의, 특히 시시도와의 헤어짐을 걱정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주었다.

 

하지만 정작 테니스부 레귤러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으엑, 오늘 반찬이 왜이래?”

? 맛있어 보이는데? 멸치나 콩이 있는 것도 아니고.”

으으, 두부가 있잖아!”

……두부도 못 먹는 거였냐!”

말캉말캉, 씹히는 느낌이 이상하단 말이야!”

 

편식이 심한 무카히가 오늘의 반찬을 두고 시시도와 아옹다옹하고 있자 나이가 몇인데 편식이냐며 무카히를 타박하는 아토베, 키가 크려면 골고루 잘 먹어야 한다며 무카히를 달래는 오시타리, 조용히 도시락을 챙기며 아쿠타카와를 깨우는 카바지. 그리고 다른 때라면 시시도를 챙기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을 오오토리는 멍한 상태로 조용히 자신의 도시락만 바라보고 있었다. 오오토리의 평상시와 다른 이 상태는 오후에 있는 테니스부 연습까지 이어졌다.

 

점심때와 달리 그러나 결국은 평소와 다른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안절부절 못하는 오오토리를 바라보며 무카히가 시시도에게 질문을 던졌다.

 

시시도, 오오토리 저 녀석 왜 저래?”

글쎄?”

 

시시도는 자신도 모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저었다.

 

, 몰라?”

 

효테이에서 시시도만큼 오오토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이가 각별한 두 사람인데 그런 시시도조차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라니 무카히가 놀라워했다.

 

마아, 곧 밸런타인이니께 누구 고백 받고 싶은 아라도 있는 모양이제.”

저 오오토리가……?”

 

시시도와 테니스밖에 모르는 오오토리가, 그것도 고백을 하는 게 아니라 받고 싶은 사람이라고? 말도 안 된다는 듯 무카히가 펄쩍 뛰었고 무어라 말은 하지 않았지만 시시도 역시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이들의 반응에 상관없이 오시타리는 태연하게 화제를 전환했다.

 

고마 퍼뜩 지로 깨워서 연습해야 안긋나. 휴식시간 다 됐데이.”

 

D-2, 아직까지는 평화로워 보이는 효테이였다.

 

 

아웃!”

폴트!”

폴트!”

게임 세트 원 바이 시시도 6-2”

쵸타로.”

 

모처럼의 단식 시합을 마치고 시시도는 조용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로 오오토리를 불렀다. 워낙 성실한데다 무슨 일이든 시시도에게 먼저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하고는 했던 오오토리였기에 이번에도 스스로 이야기해주기를 기다렸었다. 그러나 비록 연습시합이었다고는 해도, 결과를 보니 더 이상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될 모양이었다.

 

시시도가 오오토리를 데려가는 것을 본 다른 레귤러들은 각자 마무리에 들어갔다. 그리고 시시도 이상으로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던 아토베가 조용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D-1, 결국 자신이 존경하는 시시도와 개인면담에 들어간 오오토리였다.

 

하암. 오오토리 이상해.”

 

늘 잠에 취해 있는 아쿠타카와가 이상하다고 할 정도라니. 어제 시시도의 개인면담까지 받은 오오토리였지만 여전히 상태가 개선 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오오토리! 정신을 어디다 두고 있는 거냐!”

 

아토베의 일갈이 터져 나왔다.

초고속 서브가 장점 중 하나인 오오토리는 반대로 빠른 속도로 인해 볼 컨트롤이 안정적이지 못했다. 이는 다른 레귤러들에 비해 잦은 실책으로 이어졌고, 이러한 사실을 스스로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던 오오토리는 꾸준한 연습을 통해 실수를 줄여왔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이토록 볼이 엉망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라운드 20바퀴!”

 

아토베의 노성에 조용히 라켓을 내려두고 달려 나가는 오오토리의 표정이 어두웠다.

 

시시도, 어제 오오토리랑 얘기한 거 아니었어?”

 

아토베의 눈치를 보며 무카히가 슬며시 시시도에게 말을 걸었다.

 

후우, 저 녀석 무슨 일인지 말을 안 해.”

 

말주변이 없는 편인 시시도가 오오토리를 요령 있게 구슬려서 대답을 들었을 리는 만무하니 분명 본래의 성격대로 직구로 질문을 던졌을 터였다. 그렇더라도 평소라면 시시도에게 술술 이야기를 털어놓았을 오오토리가 끝까지 입을 다물었다니 이건 또 예상 밖이었다.

 

, 오시타리 말처럼 좋아하는 사람이 있나 보지.”

 

감기는 눈을 애써 뜨며 아쿠타카와가 느릿하게 말을 꺼냈다.

 

설마! 아니, 그 좋아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한테 고백할 거 같아서 그러나?!”

 

그럴 리가 없다는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오오토리의 컨디션이 엉망인 것이 영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지금 이 이야기가 사실이라는 전제하에.

 

D-day, 축 얼음 부장님 폭발

 

 

 

#2 D-day 한 걸음

 

효테이의 도서관은 중고등부를 통합해서 운영하고 있었고 별도로 존재하는 도서관 건물은 어지간한 현립, 도립 도서관 못지않은 규모를 자랑했다. 덕분에 매년 한 차례씩 대대적으로 이루어지는 신착도서 등록과 정리 및 자료 이동은 한 달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됐고 그에 필요한 인원도 적지 않았다. 이에 도서부의 공식적 요청으로 도서부원들은 한동안 수업까지 빠져가며 작업에 매달리고는 했다.

 

드디어 모든 작업이 마무리된 경사스러운 금요일이었다. 이미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잔뜩 지쳐 버렸지만, 이번 주말부터는 휴일다운 휴일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위안 삼으며 그녀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카리.”

쵸타로?”

 

흐느적거리며 걷던 걸음은 눈앞의 인물로 인해 곧 멈춰졌다. 지금쯤이면 끝났을 것 같아서 기다렸다며 오오토리는 자연스레 히노의 가방을 받아들고 흐늘거리는 몸을 바로 잡아 주었다. 이러면 자세 나빠진다는 꼼꼼한 잔소리도 빼놓지 않고.

 

연습은?”

조금 전에 끝났어.”

 

하긴, 히노가 도서관에서 나오며 시계를 봤을 때 이미 5시를 훌쩍 넘겼으니 아무리 연습량이 많기로 유명한 테니스부라도 연습을 마무리 지었을 시간이었다.

 

후에에. 쵸타로오

 

정신없이 일이 계속될 때는 몰랐지만 이제 끝이라는 생각에 자연스레 몸의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그나마 무사히 집에 돌아가야 한다는 마지막 의지조차 눈앞의 오오토리 덕분에 산산이 흩어져버리고 말았다. 오오토리를 붙잡고 실상 남들이 보기에는 매달려서히노는 모처럼 어리광을 부렸다. 나지막이 한숨을 쉰 오오토리는,

 

업어줄까?”

아니!”

 

업어준다는 말도 안 되는 제안으로 히노를 놀라게 했다. 아무리 두 사람의 체격 차이가 많이 난다지만 중학교 2학년 남학생의 평균 신장을 훌쩍 뛰어넘어 185cm의 커다란 키를 자랑하는 오오토리와 정확히 35cm의 차이였다중학교 3학년이나 되어서 남자애 등에 업히는 건 굉장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하는 히노였다.

 

반응이 조금 격했던 걸까. 약간 멋쩍어, 아니 서운해 보이는 오오토리를 보며 히노는 다시 한 번 어리광을 부렸다.

 

에이, 쵸타로도 방금 연습 끝내고 왔잖아. 쵸타로가 가방도 들어줬는데 뭘.”

 

그리고 슬쩍 오오토리의 기분을 살피며 한 마디 덧붙였다.

 

게다가 쵸타로가 기다려 줬으니까!”

 

굿잡! 어느새 표정이 자연스러워진 오오토리가 히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교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조잘조잘, 히노의 이야기가 기분 좋은 노랫소리처럼 오오토리의 귓가에 흘러들어왔다.

 

우우, 효테이는 정말 너무해!’

이런 걸 학생들에게 시키는 게 어디 있담, 정말.’

그래도 책장에 새 책들이 나란히 늘어선 거 보니까 기분 좋은 거 있지!’

 

수업시간에도, 좋아하는 테니스 연습에서도, 좀처럼 집중을 하지 못했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히노의 이야기는 하나도 빠짐없이 오오토리의 귀에 쏙쏙 들어와 스스로 얼마나 초조했었는지 새삼 깨달아버렸다. 그런 오오토리의 모습이 이상했던지 히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쵸타로, 오늘 연습 힘들었어?”

그냥 평소랑 비슷한 정도?”

, 그래? 이상하네…….”

 

오오토리의 대답이 뭔가 어색했던 걸까. 의아함을 담은 히노의 말에 오오토리가 자신의 대답을 되짚어보는 사이,

 

뭐랄까, 평소랑 조금 다른 느낌이야. 말로 잘 설명하긴 어렵지만.”

 

히노는 그렇게 말하며 겸연쩍은 듯 웃음을 지어보였다.

, 알아줬구나.’싶은 마음에 오오토리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일방통행이 아닐까, 지금까지 전전긍긍한 자신의 모습이 바보 같지만 기뻐서.

 

, 실은 연습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한다고 부장에게 혼났거든.”

 

그러니 조금은 솔직해져도 괜찮지 않을까.

 

우와, 아토베 군한테? 그거 좀 무서웠겠다.”

 

마치 자신의 앞에 아토베가 있기라도 한 것처럼 표정을 찡그리는 히노의 미간을 오오토리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문질렀다. 그러면 주름 생긴다는 말도 덧붙이며. 잔소리쟁이 시어머니라고 투덜거리면서도 바로 찡그린 표정을 푸는 그녀와 함께 집으로 향하는 길이 오오토리는 더없이 즐거웠다.

 

 

 

#3 D+1 Happy Birthday

 

두근두근, 드디어 대망의 아침이 밝아 오고야 말았습니다!’라는 문구가 생각나게 하는 날이었다. 하늘이 잔뜩 흐려지며 비처럼 내리던 눈은 드물게도 함박눈으로 변해 더더욱 학생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여아들의 바알간 수줍음이 묻어나는 고백과 함께 색색으로 예쁘게 포장된 상자들이 오오토리의 손에 하나, 둘 늘어나기 시작했다. 진지하게 고백을 들어주지만 결국은 정중한 거절의 말이 돌아감에도 오오토리를 향한 고백은 끝없이 이어졌다. 이 때문일까.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이상 상태로 테니스부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던 오오토리의 기분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 피곤해! 차라리 테니스를 하루 종일 하는 게 낫겠다.”

역시 테니스 바. 여자들 마음을 모른다니까!”

그러는 네 녀석은 초콜릿이 좋은 거겠지!”

 

많은 사람들에게 즐거운 날이라고 해서 그것이 모두의 범주에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고 오늘의 효테이에서는 테니스부 레귤러들이 그러했다. 한두 번 겪어본 일이 아니지만 올해가 유독 힘들었음을 온몸으로 느낀 시시도가 약한 소리를 하자 늘 그렇듯 무카히가 태클을 걸었다.

 

그래도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요. 조금만 더 기운내세요, 시시도 상.”

 

오오토리의 말에 레귤러들은 모두 오오토리를 바라보았다. 뭐라 말은 하지 않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얼굴들에서 느껴지는 무언의 압박에 오오토리는 그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들을 외면했다.

 

, 그래야지. 그보다 네 녀석은 기분 좋아 보인다……?”

맞아! 어제까지만 해도 비 맞은 새끼 강아지 같더니. 뭐야, 뭐야? 좋아하는 사람한테 고백이라도 받았어?”

 

수많은 질문과 의혹의 눈길에 오오토리는 매우 난처해하면서도 꿋꿋이 진실을 이야기하지 않았고 오오토리에 대한 추궁은 점심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오시타리의 말이 있고서야 겨우 멈추었다.

 

오늘 연습이 없다고 엉뚱한 행동들 하지 말도록, 아앙?”

 

때맞춰 내린 눈 덕분에 테니스부 연습을 할 수 없게 되어 레귤러들에게 주의를 주는 아토베의 눈초리가 유독, 오오토리를 노려보고 있다고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리라.

 

 

쵸타로.”

, 시시도 상.”

, 오늘 뭐 할 거냐?”

 

언제나 거침없던 시시도가 오늘따라 머뭇거리며 오오토리에게 말을 건넸다. 그에 영문을 몰라 하는 오오토리였지만 성실하게 시시도에게 답변을 들려주었다.

 

특별히 뭔가 하려는 건 없어요.”

, 그러니까, 너 오늘 생일이잖아! 모여서 밥이라도 먹을까 하고.”

…….”

 

자신의 생일도 잊고 있었던 양 오오토리의 맥 빠지는 반응에 되려 시시도가 허탈해졌다.

 

가쿠토랑 오시타리는 시간 괜찮다 그랬으니까 그럼 수업 끝나고 현관 앞에서 보자.”

 

언제 망설였냐는 듯 자신의 할 말을 내뱉은 시시도는 그대로 몸을 돌려 교실로 향했다.

 

 

오오토리의 생일 축하로 모인 자리는 곧 스트레스 해소의 장으로 바뀌었다. 패밀리 레스토랑을 거쳐 오락실과 노래방까지, 그 나이 또래 남학생들의 활발함으로 모임은 꽤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일이 바쁘다며 오오토리의 생일 축하에 참여하지 못한 아토베의 생일 선물을 카바지에게 전달받는 것으로 오늘의 모임은 마무리 되었다. 아니, 오오토리는 마무리 되었다고 생각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집 앞에 당도했을 때 오오토리가 발견한 것은 오늘 내린 눈처럼 새하얀 모자와 목도리를 두른 히노였다. 가로등 불빛이 있다고는 하지만 밤이라 어둑어둑, 위험이 내려앉은 골목길 안. 게다가 눈이 내린 겨울밤에 여자 아이 혼자 서성이고 있다니. 놀란 오오토리가 서둘러 히노에게 다가갔다.

 

아카리!”

흐익!”

 

오히려 그것이 히노를 놀라게 해버렸지만.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하고 있는 거야!”

, 그게…….”

 

안절부절,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지만 차마 하지 못하며 입만 달싹이는 모양새가 최근 며칠 동안의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만 같아 오오토리는 살짝 웃고 말았다.

 

쵸타로, 미안!”

 

대답을 기다리고 있노라니 히노가 갑자기 90도로 절을 하며 오오토리에게 사과를 건넸다.

 

?”

 

그리고 이번에는 오오토리가 어안이 벙벙해질 차례.

 

그으, 그러니까 말이야, 이번에 유독 정신이 없어서……. , 그러니까 핑계 같지만 이번에 정말정말 바빴거든……?”

 

두서없이 나오는 말의 요지는 도서부 일로 바빠서 오오토리의 생일을 잊고 있었다는 것, 그래서 매년 213일 밤에 미

리 전해주었던 초콜릿과 생일 선물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제는 거의 울기 직전의 표정으로 오오토리에게 사과를 건네는 히노의 모습에 도리어 오오토리의 얼굴에는 미소가 걸렸다.

 

그렇지만 기억해줬잖아?”

 

아직 생일인 214일이 지나지 않았으니 늦지 않은 거라 이야기하는 오오토리에게 히노가 생일 축하의 인사를 전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쵸타로, 생일 축하합니다~”

 

히노는 추위에 발그레해진 건지 쑥스러움에 색이 물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얼굴로 활짝 웃었다.

 

쵸타로, 생일 축하해!”

 

 

ps. 아토베의 호통이 떨어진 날 레귤러들이 몰래 오오토리의 뒤를 쫓았다는 건 비밀, 오오토리가 괜찮다고 했지만 계속 미안해하는 히노에게 어떤 약속을 받아냈다는 건 안 비밀.

 

 

 

 

D-Day, 그리고 다시 D-Day

 

 

#1 비밀 하나

 

뭐야, 저 녀석. 왜 다시 학교로 가는 거지?”

진짜 누구 있는 거 아냐? 시시도 이제 바람 맞는 거야?”

누가 바람을 맞는다는 거ㅇ…….”

 

무카히의 놀림에 억울함을 표현하려던 시시도의 말은, 무카히에 의해 입이 막히고 오시타리에 의해 구석으로 끌려가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끝맺을 수 없었다. 그들이 구석에 몸을 숨기자마자 뒤를 돌아보는 오오토리를 확인하며 다들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쪼매 위험했고마.”

 

아토베의 인내심이 결국 한계점을 돌파한 오늘, 무카히 이하 정 레귤러 5명은 아토베는 당연히 오지 않았고 카바지는 충실히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오오토리를 미행하는 중이었다. 미행이라기에는 다들 눈에 띄는 인물들이 우르르 모여 있는데다 지금처럼 요란스럽기까지 해 근처에 남아있던 학생들의 시선을 끌어 그 의미가 무색했다. 다만 평소와 다른 오오토리의 상태와 학교라는 특성을 잘 이용해 결과적으로는 그럭저럭 목표에 근접해 보였다.

 

오오토리가 한 곳에 멈춰 서자 미행 5인조는 근처 건물 안으로 들어가 오오토리를 지켜봤다. 지루하게 느껴지는 기다림도 잠시, 한 여학생에게 다가가 가방을 받아드는 오오토리와 그런 오오토리에게 매달리는 여학생의 모습은 이들의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유시! 진짜 유시 말이 맞았어!”

얌전한 괭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카제.”

 

오시타리의 선견지명(?)을 예찬하며 오오토리에게 연인이 있으니 이제 시시도는 외로워서 어떻게 하냐는 무카히의 놀림에도 시시도는 가만히 오오토리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래? 아는 사람이야?”

잘은 안 보이지만 우리 반 애 같은데…….”

 

커다란 오오토리에 가려 잘 보이지 않는 여아의 모습을 보며 시시도가 이름을 고민하자 카바지의 어깨에서 아쿠타카와가 하품을 하며 느릿하게 말을 이었다.

 

히노 짱이네. 히노 아카리(日野 あかり), 시시도.”

 

 

#2 비밀 둘

 

조용한 골목길 안, 새하얗게 쌓인 눈에 반사된 가로등 불빛. 그리고 예쁘게 웃으며 마음이 가득 담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는 그녀. 오오토리는 마치 자신이 커다란 무대 위에서 클라이맥스를 맞이한 배우처럼 느껴졌다.

 

쵸타로, 생일 축하해!”

축하해줘서 고마워.”

 

이틀이나 늦어지겠지만 내일은 꼭 생일 선물과 초콜릿을 전해주겠다며, 무언가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는지 묻는 히노의 말을 오오토리가 다정하게 받았다.

 

오오토리의 기쁨이 묻어나는 환한 미소에 덩달아 히노의 얼굴도 밝아지다가 곧 시무룩해졌다. 생일이니까, 축하하는 날이니까, 웃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아무래도 제때 생일을 챙기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으음, 쵸타로. 뭐 필요하다거나 그런 거 없어?”

글쎄. 그다지……?”

 

오오토리는 부러, 뜸을 들였다. 히노에게는 미안하지만 쩔쩔매는 그녀의 모습이 귀여워서, 잊지 않고 자신의 생일을 축하해준 지금이 행복해서, 그리고 이 순간이 무척이나 소중하게 느껴졌기 때문에 조금 더 여운을 즐기고 싶었다. 오오토리 자신이 전전긍긍했던 시간에 대한 보상심리가 조금도 없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선물보다는 약속해줬으면 하는 게 있는데…….”

? 그게 뭔데?”

 

딱히 가지고 싶은 물건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평소보다 늦었지만 자신의 생일을 기억해주고 이렇게 기다려주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선물을 받은 것과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지만 오오토리는 넝쿨째 굴러 들어오는 호박을 차 버릴 만큼의 바보가 아니었다. 더불어 히노의 미안함도 덜어줄 겸, 오오토리는 한 가지 부탁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앞으로 화이트데이에 아무에게도 사탕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 물론, 내 사탕은 제외하고.”

, 그거면 돼……?”

충분해.”

 

오오토리의 약속은 간단했지만 아무래도 히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약속이었다. 약속을 지킬 수 없다는 의미로서가 아니라 그 약속이 어째서 오오토리에게 선물로서의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의문이었다.

 

그렇지만 뭐랄까, 그건 너무 당연한 거라…….”

어째서?”

그야, 쵸타로 말고 나한테 사탕을 주는 사람이 있을 리 없잖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히노의 말에 오오토리는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아야 했다. 그녀 스스로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히노에 대한 이야기는 2학년인 자신에게까지 들려올 정도였다. 3학년에 귀여운 선배가 있다며, 어려 보여서 후배인줄 알았는데 선배였다며, 복도나 운동장 같은 곳에서 한 번 스쳐 지나가기라도 했던 아이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떠드는 것을 목격한 일이 여러 차례였다.

 

그럼에도 히노가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건 그녀의 성격 탓도 있겠지만 그녀의 친구들이 그만큼 노력했다는 증거이리라. 다만 그네들이 미처 파악하지 못한 중대한 오류는 오오토리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는 점이었지만.

 

그럼 약속이야.”

! 약속!”

 

모두를 들뜨게 했던 214일의 마지막이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3 White Day

 

노 짱!”

아쿠타카와……?”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림과 동시에 아이들은 서둘러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실에서 점심을 먹으려 남아있던 일부 아이들과 카바지를 기다리며 도시락을 챙기던 시시도는 갑작스런 아쿠타카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활짝 웃으며 히노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아쿠타카와와 당황한 표정의 히노가 어색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

지로라고 불러줘. 이건 선물!”

 

선물이라며 아쿠타카와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초콜릿이었다.

 

선물?”

히노 짱, 초콜릿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화이트데이 선물이야.”

으응……?”

안 돼?”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전히 히노에게 초콜릿을 내미는 해맑은 아쿠타카와의 모습에 시시도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저 녀석, 무슨 사고를 치는 거야!’라는 말을 속으로 외치며.

 

, 저기, , 약속이 있어서…….”

 

교실에 남아있던 아이들은 점심을 먹으려던 것도 멈춘 채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히노와 아쿠타카와의 대치 아닌 대치를 바라보고 있었지만 당황한 히노는 미처 그 시선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어 보였다.

 

아쿠타카와는 거듭 히노에게 초콜릿을 내밀었고 시시도는 오늘따라 카바지는 왜 이리 늦는 건지, 이 상황을 어찌 하면 좋을지에 대해 열심히 생각했지만 딱히 떠오르는 방법은 없었다.

 

어떤 약속인데?”

, 화이트데이 사탕을 한 사람에게만 받기로 했거든. 그러니까 미안하지만, 지로 군.”

 

비록 한 달이나 전의 일이지만 오오토리가 자신에게 선물로 바랐던 그 약속을 히노는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당황한 와중에도 아쿠타카와에게 제대로 거절의 의사를 표현하려고 했다.

 

우와, 그거 남자친구?”

, 아니야!”

그렇지만 이건 초콜릿인데?”

……!”

 

상큼한 표정으로 히노의 대답에서 허를 찌른 아쿠타카와는 자연스럽게 히노의 손을 잡아끌어 그 위에 초콜릿을 놓아둔 채 유유히 교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점심 맛있게 먹으라는 인사와 함께. 아쿠타카와를 멍하니 바라보던 두 사람 아쿠타카와에게 초콜릿을 건네받은 히노와 그의 행동에 머리 아파하던 시시도중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시시도였다.

 

 

점심시간을 거치며 소문은 커져만 갔다. 게다가 소문이란 것은 눈덩이와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분명 아쿠타카와가 여자 아이에게 초콜릿을 줬대.’라는 사실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아쿠타카와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화이트데이 사탕을 주며 고백했다가 차였대.’로 변해있었다. 그리고 아이들의 관심은 자연스레 그럼 그 여자가 누구인가.’에 초점이 맞춰졌고 하교시간이 돌아올 즈음에는 효테이 내에서 이 소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평소 소문에 둔감한 편인 히노지만 지금의 상황에서까지 그럴 수는 없었다. 문제라면 정작 소문의 근원지인 아쿠타카와는 점심시간이 끝나갈 무렵 언제나처럼 카바지의 어깨에 얹혀 와서 줄곧 잠들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담임선생님의 종례와 함께 아이들이 웅성거리며 히노와 아쿠타카와를 흘긋거리고 있을 때 교실 문이 큰 소리를 내며 열렸다.

 

아카리!”

? 쵸타로?”

 

평소답지 않게 조급한 모습으로 나타난 오오토리는 시시도가 아닌 히노의 자리로 곧장 향해 주변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 와중에도 아쿠타카와를 한 번 노려봐 주는 것은 잊지 않았지만.

 

약속, 지킨 거지?”

, ? , …….”

 

히노의 입에서 애매모호한 긍정의 대답이 흘러나왔지만 오오토리의 엄한 시선에 히노는 다시 말을 이었다.

 

그으, 지키긴 지켰는데 과정에 약간의 오류……가 있다고 해야 할까. 아하하.”

 

히노의 변명에 오오토리의 얼굴이 더욱 엄중해졌다.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 되더니 재차 히노의 대답을 확인했다.

 

결과적으로 지켰다는 거지?”

으응.”

 

어쩌면 히노 자신보다 더 히노를 잘 알고 있는 오오토리였다. 단순히 소꿉친구라는 이유만이 아니라 다른 이유로 더욱 더. 히노의 성격상 분명 약속을 지키고자 했을 테니, 문제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무언가 기대하는 듯 반짝이는 눈으로 자신과 히노를 바라보는 아쿠타카와이리라.

 

좋아, 그럼 이것.”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히노에게 오오토리가 아기자기한 바구니 하나를 건네며 이야기했다.

 

좋아해, 아카리. 나랑 사귀자

 

 

ps.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아쿠타카와를 보며 시시도가 다시 한 번 머리를 부여잡았다는 건 안 비밀, 오오토리의 고백에 아쿠타카와가 미션 성공!’을 외쳤다는 건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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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는 상실을 알았고 오늘은 당신을 알았으니 내일은 사랑을 알 수 있길

 

For 나미 언니 

오시타리 유시 × 하루노 유카 

 

 

 

따뜻한 봄, 꽃피는 봄.

 

봄은 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뭔가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고 행복이 가득할 것 같아서. 그리고 그런 봄이었다. 기쁘고 행복한 봄이었다. 다만 하루노는 그 봄이 결코 영원하지 않다는 걸 미처 알지 못했다. 봄이 지나가버린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마음 한구석이 크게 무너진 뒤였다.

 

처음이라 서툴러서, 겪어보지 않아서 알지 못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렇다 해서 이미 지나가버린 봄을 붙잡을 수 있는 방법도, 무너져버린 마음을 다시 채울 수 있는 방법도 아직 하루노는 알지 못했다.

 

그저 마음이 닿지 않았구나, 연이 여기까지구나 하고 스러지는 자신의 마음을 애써 달랬다.

 

처음이었기에 더욱 강렬했고 잊지 못할 것만 같았던 흔적은 시간을 조금 더 필요로 했을 뿐 결국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지는 못했다. 긴 여름이 지나 가을이, 그보다 더 긴 겨울이 지나고 다시 새싹이 돋아나는 봄의 기운이 몰려왔다.

 

 

효테이 졸업생 중 오시타리 유시를 모르는 이가 얼마나 될까. 비단 오시타리뿐 아니라 아토베가 테니스부를 이끌던 그 시절의 멤버를 기억하는 동문들이 대부분이었다. 때문에 테니스부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던 하루노조차도 그 이름을 알 수밖에 없는 사람이 오시타리였다. 그런데 그런 오시타리가 왜 여기 있는 걸까.

 

하루노 맞제? 오랜만이래이.”

 

, 오랜만이네.”

 

아사미는 잠깐 외출했구마. 금방 온다켔다.”

 

, .”

 

차는 따뜻한 게 좋제? 날씨 억수 춥데이.”

 

하루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공방 한쪽으로 들어간 오시타리가 물을 끓이며 다과를 준비했다.

 

밀크티 괘얀체?”

 

, 좋아해.”

 

다행이구마. 밀크티랑 얼그레이 쿠키래이.”

 

고마워.”

 

어쩐 일인지 모두 하루노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평소 아사미의 공방에 홍차나 쿠키가 있었던가? 의아함과 어색함에 불편했던 공기는 밀크티의 달달하고 은은한 향에 조금씩 녹아들었다.

 

맛있다.”

 

자연스럽게 나온 하루노의 반응에 오시타리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쿠키도 맛있어. 오시타리가 가져온 거야?”

 

마아, 그렇제.”

 

나오 쨩이 좋아하겠다. , 그런데 공방엔 어쩐 일이야?”

 

아사미가 공방을 오픈할 때부터 손님으로, 또는 아사미를 돕기 위해 종종 공방을 드나들고는 했던 하루노지만 지금까지 이곳에서 오시타리를 마주쳤던 적도, 아사미에게서 오시타리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었기에 오늘의 만남은 매우 뜻밖이었다. 그리고 그건 오시타리에게도 마찬가지일 터다.

 

한 번쯤은 직접 만들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말이제. 궁금하기도 했고.”

 

향수 조제 과정이 재미있기는 하지.”

 

게다가 맞춤 제작이라케도 그렇게까지 정확하게 느낌을 살려낼 줄은 몰랐다 아이가.”

 

아사미의 공방은 보편적인 향수도 판매하지만 개인 맞춤 제작으로 더 유명했다. 고객의 요청에 따라 제작되는 향수는 모두 다른 향을 지니고 있어 더 매력적이었다.

 

그럼 계속 제작하던 향수가 있는 거지? , 나오 쨩이 좀 늦는 모양인데, 괜찮으면 내가 찾아봐도 될까?”

 

그래주면 고맙제. 有香.”

 

?”

 

봄의 향기, 래이. 향수 이름.”

 

, 으응. , 잠깐만 기다리면 금방 레시피 찾아올게!”

 

당황한 하루노가 허둥대자 오시타리가 친절하게 덧붙였다.

 

참고로 지금 그거 착각 아니니께천천히 해도 된데이.”

 

새로운 봄이 꽃망울을 터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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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관심

 

 

 

지독한 무더위였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더위는 테니스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모두에게 테니스는 왜 야외 스포츠인가.’하는 원망을 하게 만들었다. 실내 스포츠였다면 적어도 햇빛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도대회를 시작으로 착실히 우승을 쌓으며 나아간 세이가쿠는 마침내 전국대회에서조차 제왕 릿카이를 꺾으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뜨거웠던 여름이 어느덧 꼬리를 내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무도 없는 텅 빈 테니스 코트를 데즈카는 눈에 담았다.

 

 

무더위를 식혀주었던 고마운 비지만 그도 잠시, 며칠째 이어지는 빗줄기에 사람들은 금세 지루해했다. 드디어 비가 그치고 더없이 청명한 하늘에는 아름다운 일곱 빛깔 무지개가 드리웠다.

 

예쁘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지만 데즈카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치열한 여름을 보내는 와중에도 소리의 주인공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 아이는 하늘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은 물론 수업 시간에도 종종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 아이는 들꽃을 좋아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교정을 산책하면 화단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들에 시선을 주었다.

 

그 아이는 구름을 좋아했다.

폭신폭신 구름이 하늘을 수놓기라도 하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 아이는 초코우유를 좋아했다.

친구들과 매점에 다녀오면 열에 아홉은 손에 초코우유를 들고 있었다.

 

그 아이는 밤하늘을 좋아했다.

달님이 예뻐서 바라보다 창문을 열어두고 자는 바람에 감기에 걸렸다며 웃었다.

 

그 아이는 바람소리를 좋아했다.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테니스코트 너머로 길게 이어진 구름과 그 위로 선명하게 내려앉은 노을은 데즈카가 보기에도 유독 아름다웠다. 아마 그 아이가 본다면 좋아하겠지. 지금 하늘이 무척 예쁜데 혹시 보고 있냐고, 아니라면 하늘을 한 번 보라고 연락한다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같은 반이지만 한 학기가 지나도록 대화 몇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연락해서 하늘을 보라고 한다면 놀라겠지. 혹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해 피할지도 모를 일이다.

 

노을이 예뻐서 네 생각이 났다며 전화할 수 있는 그런 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데즈카는 언젠가 비상연락망을 보고 기억해둔 그 아이의 번호를 떠올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카메라 어플을 실행하고 휴대폰 카메라로 정성스레 노을을 담았다. 당장 이야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 지금보다 너와 친해졌을 때 보여주고 싶어서, 혹시라도 네가 지금 하늘을 보고 있다면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서.

 

 

◇    ◇    ◇

 

 

쿠니미츠 미안!ㅠㅠ 이제 한 정거장 남았어! 금방 갈게!

 

교내 매점에서 처음으로 초코우유를 골라 하루노에게 건넸을 때 놀라 바라보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한 것처럼, 메시지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훤히 그려져 데즈카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어렸다.

 

괜찮으니 뛰지 말고 조심해서 천천히 오라는 답을 보냈다. 그럼에도 서두를 하루노를 알아서 시간을 확인하던 찰나, 마침 음료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진동벨이 울렸다.

 

자신 몫의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하루노의 핫초코 한 잔. 뛰어오느라 조금 더울 수도 있겠지만 하루노가 도착할 즈음이면 마시기에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되어있을 터였다.

 

데즈카의 얼굴 한 번, 초코우유 한 번.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거.’

 

여실히 놀람이 담긴 하루노의 표정에도 데즈카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빨대를 꽂아 건넸었다.

 

쿠니미츠! 미안, 많이 기다렸지.”

 

괜찮다.”

 

처음 그때처럼 데즈카는 하루노의 앞에 핫초코를 내려놓았다.

 

고마워.”

 

천천히 마셔라.”

 

, .”

 

역시나 뛰어오느라 조금 더웠는지 가방에 이어 카디건을 벗어 내려놓으며 하루노가 데즈카에게 사과했다.

 

근데 쿠니미츠, 우리 오늘 어디 가?”

 

다 마셨나.”

 

. 딱 먹기 좋은 온도였어.”

 

이제 데즈카의 배려를 아는 하루노는 고마움을 담아 데즈카가 좋아하는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그럼 일어나지.”

 

? .”

 

어딜 가기에 목적지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걸까. 하루노는 궁금해 하면서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데즈카를 따라나섰다.

 

 

하늘 그림 전시회?”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옛 건물과 오래된 물건들이 모여 있는 이 거리에는 작은 화랑들이 곳곳에 숨어있었는데, 보물찾기를 하듯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던 데즈카가 하루노를 이끈 곳도 그러한 화랑 중 하나였다.

 

세상에. 쿠니미츠! 고마워!”

 

기쁨으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의 하루노가 데즈카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전시회는 무척이나 하루노의 취향이었다. 마치 사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섬세한 작품들은 파랗고, 빨갛고, 하얀색이 담긴 다양한 하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신비하고 몽환적으로, 때로는 차분하게. 각양각색의 하늘은 모두 아름다웠지만 하루노는 유독 한 그림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데즈카도 마찬가지였다.

 

구름과 노을이 어우러진 붉은 듯 하면서도 분홍빛이 도는 그림은 마치 그날 같았다. 데즈카와 하루노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아직은 서로가 어색했던 연애 초반. 유독 깨끗하고 푸르렀던 하늘 탓인지 그날따라 노을이 정말 아름다웠고 데이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늘을 더 보고 싶은데, 사진도 찍고 싶은데 그건 데즈카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자신과 이야기하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하루노를 위해 데즈카는 발걸음을 늦추고 슬며시 하루노의 손을 잡아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아마도 하루노는 온통 하늘에 마음이 쏠려 데즈카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잠깐 앉았다 갈까.”

 

그제야 주변을 인식하고 놀란 하루노에게 데즈카는 말을 이었다.

 

평소보다 노을이 예뻐서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노을 때문일까. 수줍은 듯한 데즈카의 표정에 하루노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두 손을 꼭 잡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노을을 바라봤던, 그런 날이 있었다.

 

쿠니미츠. 항상 고마워. 그리고…….”

 

한참을 그림을 바라보던 하루노가 데즈카와 시선을 마주했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나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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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케시스] 균형 #2

2018. 5. 4.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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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케시스] 균형 #1

2018. 4. 29.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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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슴앓이

 

 

 

시작은 별것 아니었다.

등굣길에 가끔 스쳐지나가며 보았던 얼굴이 사실은 학교의 유명 인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해서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지나가다 이름이 들리면 한번쯤 귀를 기울이게 되고, 어디선가 얼굴이 보이면 한 번 눈길을 주거나 홀로 조금 더 반가워하는 그런 정도였을 터였다.

 

우리 학교 테니스부가 도대회 결승에 올라간 건 다들 알고 있지? 학교에서 단체로 응원을 가기로 했으니까 관심 있는 학생들은 반장한테 신청해라. 일정 인원이 모이지 않으면 학급 임원들은 강제 참가니까 참고하고.”

 

아침 조회를 마치며 담임이 남긴 말에는 한 귀로 듣고 흘리기에는 반갑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 싫다. 테니스면 야외시합이잖아. 이 날씨에 야외에서 응원이라니 분명 더위 먹을 거야.”

 

테니스부 인기 많으니까 간다는 애들 많지 않을까?”

 

아니면 레귤러들이랑 같은 반 애들 있잖아……!”

 

그런데 얼마나 모여야 하는 거야?”

 

글쎄…….”

 

모두 사토를 바라봤지만 학교에서도 오늘 아침에서야 결정된 사안인지 반장인 그녀도 딱히 담임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대다수의 관계없을 친구들과 다르게 서기인 하루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신청자가 많기를 바라는 수밖에.

 

 

날씨와 관계없이 점심시간의 교실은 활기가 넘쳤다. 아침 조회시간에 나온 이야기 덕분인지 오늘의 대화 소재는 대부분 테니스부인 모양이었다. 친구들의 후지가 미인이라든가, 1학년 루키가 제법이라든가, 그래도 역시 부장인 데즈카가 제일이라든가 하는 테니스부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노는 교내 신문에 실린 테니스부 인터뷰 기사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데즈카 잘 생겼지?”

 

데즈카?”

 

, 거기 선생님처럼 생긴 남자애.”

 

사토 쨩 너무 가차 없어.”

 

사실이잖아. 그나저나 신문부 신났겠네.”

 

, 오늘 신문 보는 애들 많더라. 평소보다 많이 찍었나 보던데 추가 분량까지 다 나간 모양이야.”

 

사진 담당이 모리였나? 아무래도 사진 영향도 좀 있을 거 같고……, 우리까지 안가도 되겠다.”

 

사토가 응원 참석 신청자 명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 사토 쨩은 가야될걸?”

 

?!”

 

아까 교무실 갔을 때 선생님들 얘기하시는 거 얼핏 들었는데 각급 반장들은 의무참가라는 거 같아.”

 

말도 안 돼!”

 

절망하며 책상위에 늘어지는 사토를 다독이며 하루노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대회가 일요일에 치러지는 만큼 참여율이 저조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미 하루노는 다이어리에 일정을 적어둔 참이었다.

 

같이 갈까?”

 

정말?!”

 

으앗, 사토!”

 

하루노의 제안에 사토가 벌떡 일어나며 책상이 덜컹거렸다.

 

미안, 미안. 하루 쨩 진짜지? ? ?? 번복하기 없다!”

 

하루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토는 하루노의 손을 덥석 잡아 이끌었다.

 

아아니, 지금 당장 이거 내러 가자!”

 

토 쨩. 이거 굳이 신청하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이미 최소 인원은 넘긴 거 같고.”

 

……. 그렇구나.”

 

그보다 슬슬 이동해야겠는걸.”

 

더운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반응이 느린 사토를 두드리며 하루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친구들에게 인사했다.

 

벌써?”

 

, 교무실 들렀다 가려고.”

 

오케이. 그럼 이따 봐.”

 

, 나도 같이 가!”

 

교무실에 들른다는 하루노의 말에 사토도 얼른 자신의 자리로가 음악책을 챙겨들었다. ‘자 모양의 본관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하루노의 반은 음악실이나 미술실과 같은 특별실이 있는 별관과 바로 연결되는 구름다리가 있었지만, 교무실과는 거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어서 교무실을 들렀다 가려면 건물을 한 바퀴 뺑 돌아야했다.

 

, 데즈카다.”

 

교무실에서 막 나오던 데즈카를 발견한 사토가 크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하는 데즈카는 신문에서 봤던 것 그대로의 단정하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그거 영어 노트야?”

 

, 수행평가 채점이 끝났으니 가져가라고 하셨다.”

 

그럼 우리 반도 곧 주시겠다. 아참, 데즈카 축하해! 우리도 응원 갈게!”

 

데즈카가 들고 있는 노트를 보고 질문하는 사토를 뒤로 하고 역시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데즈카에게 인사한 하루노는 먼저 교무실로 들어섰다. 테니스부의 도대회 결승 진출을 축하하며 응원을 가겠다는 말에 데즈카의 시선이 잠시 하루노에게 머물렀지만 그런 데즈카의 시선을 친구가 기다리지 않느냐고 오해한 사토는 괜찮다며 데즈카의 어깨를 두드려 몇 마디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하루노가 담임에게 학급일지를 제출하고 테니스부 도대회 응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마치고 나올 때에야 사토는 데즈카의 손에 들린 노트의 무게를 걱정하며 그를 자신의 반으로 돌려보냈다.

 

반장은 필참이고 신청은 더 안 받아도 된대. 아마 봉사활동 점수 같은데 반영할 모양이야.”

 

, 그럼 하루 쨩도 이름 써야 하는 거 아냐?”

 

사토 쨩이랑 데이트하는 셈 치지 뭐.”

 

하는 셈이 뭐야, 하는 셈이!”

 

진짜로 데이트를 하자며 맛있는 걸 사줄 테니 기대하라는 사토의 호언장담에 까르륵 웃는 하루노의 웃음이 교무실 앞의 조용함을 타고 복도로 퍼져나갔다. 그 소리에 머무는 시선이 있었지만 이미 계단을 내려선 두 사람에게는 미처 닿지 못했다.

 

데즈카, 뭐 해?”

 

노트를 들고 교실 앞 복도에 서 있는 데즈카를 본 같은 반 친구가 의아하게 물었다. 데즈카는 자신을 부른 친구에게 노트를 부탁한다며 건네고는 다시 창밖을 보더니 곧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전에 화장실이라도 가려나보다 생각한 친구는 바로 교실로 들어가며 급우들에게 노트를 찾아가라고 외치느라 데즈카가 향한 방향이 별관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    ◇    ◇

 

 

장미?”

 

“5월하면 역시 장미지! 장미축제도 열리고 곧 로즈 데이잖아?”

 

장미 예쁘지…….”

 

그치, 그치! 게다가 하루 쨩은 이름에서부터 꽃이 잘 어울리니까. 봄 하면 꽃, 꽃의 여왕하면 장미!”

 

하루노 유카. 친구들은 곧잘 그녀를 하루카라 부르며 봄에 피는 꽃에 비유하고는 했다. 봄 향기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꽃이니까, 그러니 하루노는 꽃과 같다고, 꽃처럼 아름답노라고, 그중에서도 5월의 찬란한 봄에 만개하는 장미를 닮았노라고 친구들의 결론은 그러했다.

 

칭찬으로 하는 고마운 말이기에 그 말대로 꽃처럼 웃고 있는 하루노였지만 종종 듣는 그 말이 낯설기만 했다.

 

생기발랄한 10대 소녀들의 대화는 장미꽃 축제에서 금세 남자친구 이야기로 이어졌다. 로즈 데이에 장미꽃을 선물할 사람이라면 역시 남자친구 아니겠냐는 것이다.

 

근데 하루노는 진짜 남자친구 없어?”

 

맞아. 우리 중에 제일 있을 것처럼 생겨서는!”

 

아서라. 얘가 연애하려면 백년은 일러.”

 

하긴, 그것도 그러네.”

 

아아, 어서 남자친구 생기면 좋겠다!”

 

소녀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곳은 별관과 이어지는 뒤뜰로 미술실 근처였다. 꽃잔디와 함께 5월에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장미가 어우러져 담소를 나누기 좋은 공간이지만 의외로 학생들이 잘 모르는 곳이었다.

 

햇살 좋은 미술실에서 책을 읽던 데즈카는 어느 순간 유독 선명하게 들어오는 소리 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발그레한 색으로 물들었을 것만 같은 목소리. ‘장미의 화려함보다는 작약의 고운 자태에 가깝지 않을까.’하고 떠오른 생각은 수업 시간을 알리는 예비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중학교 2학년의 봄, 봄 향기에 설레는 5, 데즈카의 마음에 봄꽃 씨앗 하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았다.

 

 

◇    ◇    ◇

 

 

어제 그거 봤어?”

 

역시 로망이지.”

 

카즈키 군 진짜 멋있더라.”

 

그치만!”

 

눈을 피하긴 왜 피하냐며, 잘생긴 얼굴을 1초라도 더 봐야지!’라는 카나의 말에 다들 크게 웃어버렸다.

 

맞아, 맞아. 게다가 이기면 소원도 들어주는데!”

 

우리도 해볼까?”

 

좋아! 진 사람이 매점 쏘기!”

 

유쾌한 내용만큼이나 맑은 웃음소리가 봄 햇살과 함께 학생회실에 들려왔다.

 

후훗. 귀엽네.”

 

? 네가 더 귀엽다.”

 

, 밖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서. 다들 귀엽구나 싶네. 데즈카도 저 프로그램 봤어?”

 

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반에서도 이야기들 하더군.”

 

역시 유행인가보다. 데즈카는 어때? 데즈카라면 백전백승일 것 같지만.”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군.”

 

시합에서는 상대의 눈을 피해본적 없지 않아?”

 

시합이랑은 다르니까.”

 

으음, 그런가…….”

 

해보면 알겠지.”

 

말을 마친 데즈카는 하루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 지금? , 나랑?”

 

누가 또 있나.”

 

, . 그렇지, 그렇긴 한데…….”

 

얼결에 시작된 눈 마주치기 게임에 당황한 하루노의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다 이내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렇게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 반칙이야 데즈카.”

 

다시 해도 상관없다만.”

 

아니, 다시 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 같아……. 그래서 소원이 뭔데?”

 

데즈카가 이런 게임에 흥미를 가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뭔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소원을 물었다.

 

유카.”

 

……?!”

 

이름.”

 

그러니까……, 쿠니미츠?”

 

데즈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하루노의 대답에 긍정했다.

 

이름으로 부르는 게 데즈카 소원이야?”

 

쿠니미츠.”

 

, . 아직 어색해서.”

 

아직 입에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하루노는 데즈카의 이름을 계속 중얼거렸고 덕분에 데즈카의 귀 끝이 빨갛게 변했지만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덕분에 하루노는 그 사실을 채 발견하지 못했다.

 

 

◇    ◇

 

 

하루 쨔아아앙!”

 

, .”

 

어떻게 고등부에서는 한 번을 같은 반이 되질 않는 거야! 심지어 멀어!”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줄 알겠다.”

 

맞아, 하루노. 그거 계속 받아주면 버릇 나빠진다?”

 

. 내 하루 쨩 탐내지 말아줄래?”

 

뭐래.”

 

중등부에서 시작된 인연은 사토와 하루노를 중심으로 고등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의외라면 중등부에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고는 했던 사토가 고등부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하루노가 학생회에 들어간 점이었다.

 

사토, 내년에도 학생회 안 할 거야?”

 

으음, 좀 보고.”

 

하루노는 할 테고 회장은 역시 데즈카 군이려나?”

 

현재 학생회에서 데즈카와 함께 활동 중인 하루노를 보며 아사미가 질문했다.

 

. 현재 선배들이 지지하는 것도 그렇고 쿠니미츠가 선거에 나갈 거 같아.”

 

…….”

 

역시.”

 

드디어.”

 

잠깐. 잠깐, 잠깐만 하루 쨩. ? 쿠니미츠? 쿠니미츠으??”

 

언제부터 쿠니미츠였냐며, 내년에는 기필코 학생회에 들어가겠다며 사토는 한참 열을 내었고 다른 친구들은 친구 연애를 방해하는 거 아니라며 사토를 타박했다. 그러나 곧 하루노의 연애가 아니라며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경위를 듣고 난 후 친구들의 타박은 하루노를 향했다.

 

아직도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맞아. 게다가 이름으로 부르면서? 사토도 아직 이름으로 안 부르는데.”

 

아니 대체 내가 왜…….”

 

친구들이 구박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루노가 울상을 지었지만 그녀의 단짝인 사토도 이번만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도 이름으로 불러달라며 칭얼거리는 사토에게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게 하루노의 최선이었다.

 

 

◇    ◇    ◇

 

 

 

 

* 눈 마주치기 게임

: 둘이 마주보고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쪽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거나 돌리면 그 사람이 지는 게임. 서로 연인사이면 진 쪽이 이긴 쪽에게 키스해주고 친구 사이면 소원을 들어줘야 함

 

Posted by D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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