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관심
지독한 무더위였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더위는 테니스에 대한 열정이 가득한 모두에게 ‘테니스는 왜 야외 스포츠인가.’하는 원망을 하게 만들었다. 실내 스포츠였다면 적어도 햇빛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 상관없이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도대회를 시작으로 착실히 우승을 쌓으며 나아간 세이가쿠는 마침내 전국대회에서조차 제왕 릿카이를 꺾으며 우승을 거머쥐었다.
그렇게 길고도 짧았던, 뜨거웠던 여름이 어느덧 꼬리를 내리고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무도 없는 텅 빈 테니스 코트를 데즈카는 눈에 담았다.
무더위를 식혀주었던 고마운 비지만 그도 잠시, 며칠째 이어지는 빗줄기에 사람들은 금세 지루해했다. 드디어 비가 그치고 더없이 청명한 하늘에는 아름다운 일곱 빛깔 무지개가 드리웠다.
‘예쁘다.’
중얼거림에 가까운 작은 목소리였지만 데즈카는 그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치열한 여름을 보내는 와중에도 소리의 주인공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았던 까닭이다.
그 아이는 하늘을 좋아했다.
쉬는 시간은 물론 수업 시간에도 종종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봤다.
그 아이는 들꽃을 좋아했다.
점심시간에 친구들과 교정을 산책하면 화단에 핀 이름 모를 작은 꽃들에 시선을 주었다.
그 아이는 구름을 좋아했다.
폭신폭신 구름이 하늘을 수놓기라도 하면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계속 사진을 찍었다.
그 아이는 초코우유를 좋아했다.
친구들과 매점에 다녀오면 열에 아홉은 손에 초코우유를 들고 있었다.
그 아이는 밤하늘을 좋아했다.
달님이 예뻐서 바라보다 창문을 열어두고 자는 바람에 감기에 걸렸다며 웃었다.
그 아이는 바람소리를 좋아했다.
바람에 이리저리 부딪히는 나뭇잎 소리에 기분 좋은 표정을 지으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그 아이는…….
테니스코트 너머로 길게 이어진 구름과 그 위로 선명하게 내려앉은 노을은 데즈카가 보기에도 유독 아름다웠다. 아마 그 아이가 본다면 좋아하겠지. 지금 하늘이 무척 예쁜데 혹시 보고 있냐고, 아니라면 하늘을 한 번 보라고 연락한다면 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같은 반이지만 한 학기가 지나도록 대화 몇 번 해보지 않은 사람이 연락해서 하늘을 보라고 한다면 놀라겠지. 혹 이상한 사람이라 생각해 피할지도 모를 일이다.
노을이 예뻐서 네 생각이 났다며 전화할 수 있는 그런 사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데즈카는 언젠가 비상연락망을 보고 기억해둔 그 아이의 번호를 떠올리며 휴대폰을 들었다. 카메라 어플을 실행하고 휴대폰 카메라로 정성스레 노을을 담았다. 당장 이야기해주지는 못하더라도 언젠가 지금보다 너와 친해졌을 때 보여주고 싶어서, 혹시라도 네가 지금 하늘을 보고 있다면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어서.
◇ ◇ ◇
「쿠니미츠 미안!ㅠㅠ 이제 한 정거장 남았어! 금방 갈게!」
교내 매점에서 처음으로 초코우유를 골라 하루노에게 건넸을 때 놀라 바라보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한 것처럼, 메시지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울상을 지으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지 보지 않아도 그 모습이 훤히 그려져 데즈카의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어렸다.
괜찮으니 뛰지 말고 조심해서 천천히 오라는 답을 보냈다. 그럼에도 서두를 하루노를 알아서 시간을 확인하던 찰나, 마침 음료가 준비되었음을 알리는 진동벨이 울렸다.
자신 몫의 아메리카노 한 잔과 하루노의 핫초코 한 잔. 뛰어오느라 조금 더울 수도 있겠지만 하루노가 도착할 즈음이면 마시기에 적당히 따뜻한 온도가 되어있을 터였다.
데즈카의 얼굴 한 번, 초코우유 한 번. ‘어떻게 알았어? 내가 이거 좋아하는 거.’
여실히 놀람이 담긴 하루노의 표정에도 데즈카는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이며 빨대를 꽂아 건넸었다.
“쿠니미츠! 미안, 많이 기다렸지.”
“괜찮다.”
처음 그때처럼 데즈카는 하루노의 앞에 핫초코를 내려놓았다.
“고마워.”
“천천히 마셔라.”
“응, 응.”
역시나 뛰어오느라 조금 더웠는지 가방에 이어 카디건을 벗어 내려놓으며 하루노가 데즈카에게 사과했다.
“근데 쿠니미츠, 우리 오늘 어디 가?”
“다 마셨나.”
“응. 딱 먹기 좋은 온도였어.”
이제 데즈카의 배려를 아는 하루노는 고마움을 담아 데즈카가 좋아하는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그럼 일어나지.”
“응? 응.”
어딜 가기에 목적지도 이야기해주지 않는 걸까. 하루노는 궁금해 하면서도 더 이상 묻지 않고 데즈카를 따라나섰다.
“하늘 그림 전시회…?”
“네가 좋아할 것 같아서.”
옛 건물과 오래된 물건들이 모여 있는 이 거리에는 작은 화랑들이 곳곳에 숨어있었는데, 보물찾기를 하듯 골목길을 이리저리 헤매던 데즈카가 하루노를 이끈 곳도 그러한 화랑 중 하나였다.
“세상에. 쿠니미츠! 고마워!”
기쁨으로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의 하루노가 데즈카에게 와락, 달려들었다.
전시회는 무척이나 하루노의 취향이었다. 마치 사진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섬세한 작품들은 파랗고, 빨갛고, 하얀색이 담긴 다양한 하늘의 모습을 담고 있었다. 때로는 선명하게, 때로는 신비하고 몽환적으로, 때로는 차분하게. 각양각색의 하늘은 모두 아름다웠지만 하루노는 유독 한 그림 앞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리고 그건 데즈카도 마찬가지였다.
구름과 노을이 어우러진 붉은 듯 하면서도 분홍빛이 도는 그림은 마치 그날 같았다. 데즈카와 하루노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아직은 서로가 어색했던 연애 초반. 유독 깨끗하고 푸르렀던 하늘 탓인지 그날따라 노을이 정말 아름다웠고 데이트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루노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하늘을 더 보고 싶은데, 사진도 찍고 싶은데 그건 데즈카에게 예의가 아니었다. 자신과 이야기하면서도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하루노를 위해 데즈카는 발걸음을 늦추고 슬며시 하루노의 손을 잡아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 아마도 하루노는 온통 하늘에 마음이 쏠려 데즈카가 손을 잡았다는 것도,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할 게 분명했다.
“잠깐 앉았다 갈까.”
그제야 주변을 인식하고 놀란 하루노에게 데즈카는 말을 이었다.
“평소보다 노을이 예뻐서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은데.”
노을 때문일까. 수줍은 듯한 데즈카의 표정에 하루노는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벤치에 앉아 두 손을 꼭 잡고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노을을 바라봤던, 그런 날이 있었다.
“쿠니미츠. 항상 고마워. 그리고…….”
한참을 그림을 바라보던 하루노가 데즈카와 시선을 마주했다.
“좋아해. 정말 좋아해.”
“나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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