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이야기 | 장미빛 스카프
내가 왜 이럴까 오지 않을 사람을 어디선가 웃으면서 와줄 것만 같은데
봄이 시작되기에는 이른 입춘이 지나고 경칩마저 지나간 지 오래지만 동장군은 그리 쉬이, 자신의 자리를 봄에게 내어주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들의 마음에는 이미 봄이 내려앉았는지 제법 쌀쌀한 날씨와 다르게 거리에는 가볍고 화사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 가득했다.
깔끔한 슈트 차림의 댄디한 신사, 그러나 중년으로 보기에는 무언가 미묘한 외모로 거리에서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끌던 사카키는 곧 붐비는 거리를 벗어나 커다란 통유리의 투명함이 인상적인 카페 한편에 자리 잡았다. 차가운 공기와 다르게 봄을 주장하는 포근한 햇살을 한가득 느낄 수 있는 창가에 자리를 잡았음에도 거리를 바라보는 사카키의 모습에서는 아련함이 묻어나 뭇 여성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그런 주변 사람들의 소란함과 관계없이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던 사카키는 조용히 눈을 감으며 누군가를 떠올렸다. 금세라도 거리 어딘가에서 훌쩍 튀어나와 자신을 발견하고 환하게 미소 지으며, 카페의 문을 열고 들어올 것만 같은 그 누군가를. 커다란 통유리와 따뜻한 햇살, 그리고 커피.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차라리 그 사람을 만나지 않았던들 이 고통 이 괴로움 나에겐 없을걸
여름의 햇살은 뜨겁기 그지없어서 대개 사람들의 환영을 받지 못하기 마련이었다. 태양열을 연구하는 사람들이라면 혹 다를까 싶지만. 그럼에도 하루노는 시원하게 에어컨이 가동되고 있는 실내보다 햇볕을 가려주는 파라솔이 있는 야외 테이블을 더 선호하고는 했다. 여름 한낮, 장밋빛 원피스를 입은 하루노는 그렇게 사카키의 마음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비록 하루노 스스로는 전혀 의도하지 않았을 지라도.
“사카키 상, 덥지 않으세요?”
한여름에도 정식으로 슈트를 차려입은 사카키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하루노가 질문했다. 그리고 하루노의 질문을 받은 사카키는 조금 곤란해졌다.
“……익숙해지면 그다지.”
“으음.”
사카키의 대답이 미심쩍다는 듯이, 하루노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사카키를 살폈다. 그녀의 시선에 오히려 열이 오르는 느낌이 들어 사카키는 질문을 하루노에게 넘겼다.
“그대는, 덥지 않은가?”
지금 그들이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는 곳은 하루노가 선호하는 야외 테이블이었다.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조금은요. 그렇지만 에어컨 바람보다는 이게 나아서요.”
어깨를 으쓱이며 하루노가 이유를 설명했다.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을 쐬면 종종 열이 오르는 하루노에게 여름 햇빛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군.”
그리고 사카키는 하루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머릿속에 자리 잡은 ‘하루노 유카’라는 이름의 방에 주의사항을 꼭꼭 새겨 넣었다.
장미빛 장미빛 스카프만 보면은 내 눈은 빛나네 걸음이 멈춰지네
하루노와 사카키가 처음 만났던 여름을 지나 가을, 겨울을 거쳐 봄이 찾아왔다. 계절마다 하루노는 장밋빛을 빠트리지 않았다. 장밋빛 원피스, 장밋빛 구두, 장밋빛 스웨터, 그리고 그녀의 얼굴을 닮은 장밋빛 스카프.
자신의 고백에 장밋빛 홍조를 띄우던 하루노의 얼굴을 사카키는 기억했다. 봄의 찬란함, 여름의 푸르름, 가을의 화려함, 겨울의 포근함.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던 장밋빛 스카프―
네 개의 계절을 거쳐 사카키와 하루노가 처음 인사를 나눴던 여름을 앞둔 문턱에서, 장밋빛 스카프를 곱게 맨 하루노는 사카키에게 인사를 전했다. 그들의 만남에 마지막을 알리는 인사를. 장밋빛으로 물든 하늘 때문일까. 헤어짐을 이야기하는 하루노의 얼굴도 그 색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사카키는 그런 그녀의 말을 거절할 수 있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네 개의 계절이 다시 네 번이 지난 지금, 사카키의 머릿속에는 ‘하루노 유카’라는 이름의 방이 그대로 존재했고 눈은 여전히 장밋빛에 멈춰 섰다.
허전한 이 마음을 어떻게 달래 보나 내게서 떠나버린 장미빛 스카프
우습게도, 첫사랑이었다.
다른 이에게 이야기해도 믿지 않을 터이고 이야기할 일도, 이야기할 사람도 없지만 적지 않은 나이에 찾아온 첫사랑은 장밋빛이었다. 그래서 풋풋했지만 나이에 맞는 열정도 있었다. 하지만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속설처럼 결국 사카키는 혼자 남아버렸다.
하루노가 떠난 뒤 사카키에게는 새로운 취미가, 습관이 생겼다. 계절에 관계없이 그의 목에는 늘 화려한 무늬와 색상을 지닌 스카프가 매어져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모습에 어색해하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스카프는 금세 사카키의 매력을 나타내는 요소로 자리 잡았다.
여름, 가을, 겨울, 봄. 1년 365일. 항상 스카프를 매는 사카키였지만 단 한 가지, 장밋빛의 스카프만은 한 번도 매어본 적이 없었다. 자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색. 장밋빛은 그녀, 하루노를 위한 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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