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에게, 데즈란

테니 2014. 9. 1. 23:12

노래와 이야기 | J에게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며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대 그리워하네

 

청명한 날이었다. 간밤에 내린 세찬 비는 혼탁했던 공기를 깨끗하게 해준 대신 봄의 따사로움을 앗아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서늘한 봄바람에 사람들은 부르르 몸을 떨며 가볍기 그지없는 봄옷의 옷깃을 여몄다.

이런 날이면 데즈카는 별다른 말없이 아침 일찍 란에게 들러 란이 옷 입는 것을 챙겼다. 감기 조심하라는 말 대신 따뜻한 외투를 입게 하고 목에는 스카프를 둘러 주었다. 그 흔한 걱정 한 마디 하지 않으면서도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그저 그렇게 란에게 애정을 주었다. 그 자연스러운 데즈카의 애정에 익숙해졌던 란은 오늘 날씨가 추울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음에도 스카프를 챙기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목에서 느껴지는 쎄한 바람을 그대로 느끼며, 란은 가벼운 스카프 하나가 주는 무게감이 결코 작지 않았음을 새삼 깨달았다.

쿠니미츠…… 보고 싶다.”

작게 데즈카의 이름을 부르는 란의 목소리에 아아, 나도 보고 싶다.’라고 대답하는 데즈카의 목소리가 바람결에 들리는 것도 같았다.

 

 

J 지난 밤 꿈속에 J 만났던 모습은 내 가슴속 깊이 여울져 남아있네

 

함박눈이 펑펑 내린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보통이라면 오늘 같은 날, 이런 날씨에, 밖으로 나가는 것을 기피했을 란이 어쩐 일로 눈 구경하러 가자고 데즈카를 졸랐다. 그저 나가고 싶다는 한 마디여도 데즈카에게는 충분했겠지만 란의 흔치 않은 칭얼거림은 오히려 데즈카를 웃게 했다.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며 어르듯 란을 바라보는 데즈카의 눈에 애정 어린 따뜻한 미소가 번졌다. 어쩐지 그것이 부끄러워진 란이 획 토라진 것토라진 척 한 것도 데즈카에게는 즐거움이었다.

외출을 결정하기는 했지만, 사람들에게 부대끼지 않으면서 깨끗하고 하얀 눈을 보고 싶었기에 란과 데즈카는 학교로 목적지를 정했다.

어라? 쿠니미츠, 선객이 있나본데?”

교문을 통과해 테니스 코트로 향하는 길에는 벌써 누군가의 발자국이 어지러이 찍혀있었다. 발자국만으로도 누군지 짐작한 란은 데즈카의 팔을 흔들며 걸음을 재촉했다. 그렇게 도착한 테니스 코트에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레귤러 전원이 모여 있었다. ‘너도?’라는 느낌으로 서로를 바라보던 레귤러들은 부장이 지각이라는 에치젠의 투덜거림을 시작으로 이내 한바탕 크게 웃어버렸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요. 한 게임 어때요?”

하하다들 어쩔 수 없네.”

모모시로가 유쾌한 목소리로 시합을 제안하자 모두 기다렸다는 듯 옷을 갈아입으러 부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란이 쿠니미츠가 테니스 하는 거 보고 싶어.’라며 가만히 서 있는 데즈카의 등을 살짝 떠밀었다.

테니스로 시작했지만 끝은 눈싸움이었다. 여느 때처럼 카이도와 모모시로가 아옹다옹하자 에치젠이 눈을 던진 것이 시작이었다. 눈싸움에 테니스 라켓이 사용되는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흥겨운 시간이었다.

 

또르륵

깊은 잠에서 깨어 이제 막 눈을 뜬 란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볼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렸다.

왁자지껄했던 꿈은 굉장히 생생해서 오히려 지금이 꿈인 것만 같았다. 무뚝뚝한 것 같지만 누구보다 애정 어린 눈으로 란을 지켜보던 데즈카를 볼 수 없는 현실에, 먹먹해지는 가슴속 깊이 그의 모습이 여울졌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더워어

조금씩이지만 데즈카와 꾸준히 운동을 한 보람이 있는지 제법 체력이 붙은 란이었다. 다만 몸이 건강해졌다는 증거로 추위를 덜 타게 된 대신, 그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엄청난 더위를 체감하게 된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처음 느껴보는 더위에 란이 맥을 추지 못하고 데즈카에게 달라붙어 징징거렸다. 데즈카는 연신 덥다는 말을 하면서도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는 란이 귀여워,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 손에 스마트폰을 들고 무언가를 보던 데즈카가 란을 욕실 앞으로 떠밀었다.

쿠니미츠……?”

의아해 하는 란에게 외출 준비를 하라는 데즈카의 대답이 들려왔다.

 

집이든 밖이든 덥고 습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기분 전환은 되는 것 같았다. 물을 주지 않아 시들해진 화초마냥 기운이 없던 란이 조금 살 것 같은지 데즈카에게 재잘거렸다.

데즈카가 란을 데리고 도착한 곳은 박물관이었다. 건물 한 면을 차지하는 커다란 플래카드가 걸린 전시는 [바로크로코코 시대의 궁정문화]였다. 지하철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란이 흥미를 보였던 것을 기억한 데즈카가 마침 소셜에 올라온 전시회 티켓을 발견한 것이었다.

이제 완연히 생생해진 란이 데즈카를 향해 함박웃음을 지었다. 고맙다며 데즈카의 볼에 남긴 흔적은 소소한 덤이었다.

 

 

J 난 너를 못 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 길을 난 이 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가을에 사람이 쉬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일조량이 적어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곳은 늘 흐려서 좀처럼 해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공기가 나쁘기 때문인지 파란 하늘 또한 만나기 어려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 진행된 학기말 시험에 지친 란에게 이런 날씨는 더더욱 반갑지 않았다. 연이은 시험과, 과제와 토론으로 몸과 마음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지만 어쩐지 이대로 집에 돌아가기 억울해진 란은 근처 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날씨지만 그곳에 가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아서.

 

잎이 무성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리한 이 공원은 란의 기억 속 그곳과 제법 유사한 느낌이었다. 다만 그곳에서는 단풍을 구경하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걸었었고, 이곳에는 란 혼자라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란은 젖은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아 보슬비를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란은 머리가 온통 축축해질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것이 몸살감기가 오려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집에 돌아가는 걸음을 서둘렀다.

 

집에 다다랐을 때 문 앞에 보이는 익숙한 인영에 란이 멈칫했다.

쿠니미츠……?”

혹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아니면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환영을 본 것이 아닐까 생각한 란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 걸음 더 다가와 자신의 외투를 란에게 걸쳐주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비에 푹 젖은 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역력한 표정이었다.

쿠니미츠? 진짜 쿠니미츠야?”

여전히 어리벙벙한 란에게서 가방을 앗아든 데즈카가 열쇠를 찾아 태연히 문을 열었다.

연락이라도 해주지!”

그랬으면 학교가 마치자마자 바로 집으로 왔을 터인데 아까운 시간낭비를 했다며 란이 투덜거렸다. 투덜거림인데도 그 안에 스며든 기쁨이 선명해서 데즈카의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혼자 걸었던 그 길을 이제 다시 그대와 함께.

 

 

 

Posted by D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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