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와 이야기 | J에게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며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대 그리워하네
#1. 봄
청명한 날이었다. 간밤에 내린 세찬 비는 혼탁했던 공기를 깨끗하게 해준 대신 봄의 따사로움을 앗아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서늘한 봄바람에 사람들은 부르르 몸을 떨며 가볍기 그지없는 봄옷의 옷깃을 여몄다.
이런 날이면 집사는 유독 잔소리가 심했다. 옷차림이 그게 무어냐며, 그렇게 얇게 입었다가 감기라도 걸려서 누굴 고생시키려고 그러느냐며. 하지만 잔소리 끝에는 봄 향기를 담은 노랑 스카프를 손수 아가씨의 목에 둘러주고, 가볍지만 따뜻한 외투를 건네던 집사였다.
아침에 서두르느라 스카프를 깜빡한 아가씨는 목에서 느껴지는 쎄―한 바람을 그대로 느끼며 이게 다 집사가 챙겨줘 버릇해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집사가 나쁜 거라고 작게 원망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J 지난 밤 꿈속에 J 만났던 모습은 내 가슴속 깊이 여울져 남아있네
#2. 겨울
크리스마스였던가, 아니면 설날이었던가.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폭설이 내린 한겨울, 도심 외곽에 위치한 저택은 세상과 단절되었다. 그러나 유능한 집사의 선견지명으로 저택은 안전했고 또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모두 마친 뒤였다. 오히려 저택의 지붕 곳곳과 정원의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이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나 눈의 여왕이라도 머물고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했다.
이에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어른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저택 밖으로 나와 한편에서는 눈사람을 만들고, 한편에서는 아가씨의 주도로 눈싸움을 시작했다. 기세 좋게 집사와 편을 가른 아가씨에게 동조해 평소라면 집사의 눈 한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던 고용인들이 집사를 집중 공격했다. 그 수많은 눈덩이를 요령껏 피하며 서늘하게 웃는 집사였지만 그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즐거워했다. 결국 집사가 아가씨의 솜방망이 같은 눈뭉치를 맞아주는 것으로 흥겨웠던 눈싸움이 막을 내렸다.
저택에 들어와 벽난로에 몸을 녹이며 따뜻한 차를 마시는 동안, 집사는 아가씨의 젖은 머리를 부드럽게 말려주었고 노곤해진 아가씨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또르륵―
깊은 잠에서 깨어 이제 막 눈을 뜬 아가씨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볼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렸다.
왁자지껄했던 꿈은 굉장히 생생해서 오히려 지금이 꿈인 것만 같았다. 아가씨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던 그 사람이,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에, 먹먹해지는 가슴속 깊이 그의 모습이 여울졌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3. 여름
‘더워어―’
더위에 지친 아가씨가 대리석 바닥에 눌어붙어 뒹굴었다. 시원한 대리석이 아가씨의 체온으로 뜨뜻미지근해지면 데굴데굴 굴러서 옆으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그런 아가씨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집사는 곧 한숨을 내쉬며 아가씨를 일으켜 세웠다. 아무리 더워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있으라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던 아가씨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방에서 집사에게 질질 끌려 밖으로 이동했다. 운동을 하고 오라며, 땀을 흘린 뒤 씻고 나면 한결 개운해질 거라고 말하는 집사는 굉장히 단호했다. 이런 목소리의 집사에게는 아무리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아가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심한 반항을 담아 아랫입술을 툭, 내밀어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꾸역꾸역 억지로 운동을 마친 아가씨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집사가 준비한 것은 우유를 얼린 얼음을 갈아 만든 팥빙수였다. 팥빙수 하나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만면에 행복한 웃음을 띤 아가씨가 ‘집사 최고!’를 외쳤다.
J 난 너를 못 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 길을 난 이 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4. 가을
가을에 사람이 쉬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일조량이 적어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곳은 늘 흐려서 좀처럼 해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공기가 나쁘기 때문인지 파란 하늘 또한 만나기 어려웠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 진행된 학기말 시험에 지친 아가씨에게 이런 날씨는 더더욱 반갑지 않았다. 연이은 시험과, 과제와 토론으로 몸과 마음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지만 어쩐지 이대로 기숙사에 돌아가기 억울해진 아가씨는 근처 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날씨지만 그곳에 가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아서.
잎이 무성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리한 이 공원은 아가씨의 기억 속 그곳과 제법 유사한 느낌이었다. 다만 그곳에서는 단풍을 구경하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걸었었고, 이곳에는 아가씨 혼자라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아가씨는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아 보슬비를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아가씨는 머리가 온통 축축해질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것이 몸살감기가 오려는 모양이라 아가씨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오실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기숙사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인영이, 아가씨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늘 듣던 인사를 했다. 혹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아니면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아가씨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가씨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와 도톰한 외투를 걸쳐주었다.
“어딜 갔다 이제야 오십니까.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어, 어?”
여전히 어리벙벙한 아가씨에게서 가방을 앗아든 집사가 태연히 기숙사 문을 열었다.
“아가씨 곁에 제가 있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간 혼자서 밥은 제대로 챙겨 드셨는지 모르겠군요.”
“집사? 진짜 집사야?”
당당한 선언,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잔소리였다. 그제야 현실에 로그인한 아가씨가 집사를 붙잡고 빽, 소리를 질렀다.
“네, 아가씨.”
혼자 걸었던 그 길을 이제 다시 당신과 함께.
[겨울, 봄, 여름, 그리고 가을. 이만하면 충분한 시간이다. 당신이 나를 되새기고 그리워하기에. 당신이 나를 그리워하도록 만들기 위해 당신에 대한 그리움쯤은 참을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당신과 함께.] by 검은 집사
201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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