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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고양이가 찾아왔다

 

키워드 : 마카롱 장갑 고양이

부    제 : 운명의 고양이

리본(Reborn) x 나카지마 코토리(中島 小鳥)

 

서율

 

 

 

#1.

 

“미야옹-.”

 

마치 정장을 입은 양 까만 몸에, 하얀 턱시도와 장갑을 낀 매력적인 고양이는 어느 날 나카지마의 귀갓길에 나타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아직 어려보이는 모습과 빤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마음이 쓰여 몇 번 쓰다듬어줄 요양으로 눈높이를 맞추고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그대로 고양이에게 간택당한 모양이었다.

 

안된다고 연신 고양이를 밀어냈지만 꿋꿋이 그녀를 따라온 고양이는 결국 나카지마의 집에 입성했다. 급한대로 마트에서 사료를 구매해 그릇에 담아주었지만 함께 놓인 물만 몇 번 할짝였을뿐 사료에는 입도 대지 않았다. 날렵해 보이는 몸매만큼 날랜 동작으로 책장 위로 올라간 고양이는 그루밍을 하는가 싶더니 곧 잠이 들었다.

 

‘식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은 걸까.’

 

물은 마셨으니 그래도 괜찮겠지 하고 애써 마음을 달랜 나카지마는 잠이 든 고양이 위에 담요를 덮어주고 자신도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나카지마는 바쁘게 출근을 준비하면서 다시 사료 한 그릇과 물 한 그릇, 혹시 몰라 고양이용 우유까지 챙긴 뒤 인사를 하고 회사로 출근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고양이를 키우는 동료에게 어제의 일을 설명하고 조언을 구하자 동료는 인식칩이 있을지도 모르고, 길고양이라면 건강상태 확인을 위해서라도 동물병원에 먼저 가보는 게 좋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나카지마는 동료들의 도움을 받아 이른 퇴근을 하며, 마트에 들러 이동장을 구매해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똑똑-

 

자신의 집이지만 혹여 고양이가 놀랄까 노크로 인기척을 낸 뒤 나카지마는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열린 틈사이로 고양이가 달려 나갈까 걱정하며.

 

“고양아-?”

 

나카지마가 들어서자 동작을 인식한 현관 등에 반짝- 불이 들어오고, 이어서 도어록이 삐리릭- 소리를 내며 닫히자 방에서 고양이가 유유히 걸어왔다.

 

“야옹.”

 

마치 다녀왔냐는 인사를 하듯 울음소리와 함께. 그 모습에 알 수 없는 안도감을 느낀 나카지마는 천천히 몸을 낮춰 고양이와 눈을 마주하고 인사했다.

 

“다녀왔어.”

 

그 인사에 알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듯 고개를 한 번 끄덕인 고양이는 다시 몸을 돌려 책장 위로 올라갔다. 누군가 집에 있다는 건, 반겨준다는 건 이런 거구나. 중얼거리며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카지마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어렸다.

 

“아.”

 

기쁨도 잠시, 나카지마는 급히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가 아침에 사료 그릇을 놓아둔 자리를 확인했다. 나란히 놓인 그릇 세 개는 아침과 큰 차이가 없었다. 물과 우유는 조금 줄어든 것도 같았지만 사료는 아마 한 알도 줄지 않았을 것 같았다. 혹시 어디가 아픈 걸까. 나카지마는 더욱 걱정이 되어 고양이를 불렀다.

 

“고양아.”

 

나카지마의 부름에 담긴 약간의 망설임을 쉬이 눈치 챌 만큼 영리한 고양이는 책장에서 사뿐히 뛰어내려 나카지마의 앞으로 다가와 애교를 부렸다. 그 행동에 또 마음 한 구석이 간지러웠지만 나카지마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혔다.

 

“고양아, 병원에 가보자. 네 주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고양이의 까만 털은 짧지만 윤기가 흘렀고, 동작에는 여유가 있으며, 사람에게 다가오는데 익숙해 보였다. 누군가가 정성을 다해 돌봤을지도 모르는 고양이. 주인이 있다면 지금쯤 애타게 찾고 있을 터였다. 근처에 고양이를 찾는 전단지가 붙어 있지는 않았지만, 근방에 있는 동물병원이라고는 한 곳밖에 없으니 병원에서는 주인을 알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고양이는 이동장에 익숙한지 자연스럽게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에 두려움이라고는 티끌 한 점 보이지 않아, 나카지마는 자신도 모르게 멈칫했지만 그걸 알아차린 건 이미 이동장에 들어간 고양이 뿐이었다.

 

* * *

 

“매우 건강합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혹시 칩이나 주인은….”

“아쉽게도 이 고양이에게는 인식칩이 없네요. 이 병원에 다닌 기록도 없고요.”

“….”

“운명의 고양이라고 하죠.”

“운명의 고양이요?”

“보통 이런 경우를 보고 고양이가 집사를 간택했다고 하거든요.”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수의사의 표정이 담백해 마치 나카지마가 고양이를 키우는 게 당연하다는 투였다.

 

“…위탁으로 하죠. 혹시 이 아이를 입양해줄 사람을 병원에서 알아봐줄 수 있나요?”

“가능합니다.”

“아, 나이는 어떻게 될까요?”

“글쎄요, 다 자란 것 같지만 아직 어린 티가 남아있는 걸 보면 한 살에서 두 살 사이가 아닐까, 싶군요. 그나저나… 하얀 리.본.이 참 잘 어울리는 아이네요.”

“하얀 리본이요…?”

 

보통 턱시도라고 표현하던데 이 사람의 눈에는 또 다르게 보이는 걸까. 하지만 듣고 보니 하얀 보타이를 멘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자신을 제외하고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고양이는 불만을 표하듯 꼬리로 툭 수의사를 건드렸다.

 

어쨌든 고양이는 청소년기로 추정됐고, 진료를 마친 나카지마는 고양이가 먹을 사료와 간식, 그리고 필요한 물품들을 추천받아 계산했다. 친절하게도 병원은 배송 서비스를 제공했고 나카지마는 지금 당장 필요한 약간의 것들만 챙겨 감사 인사를 하고 병원을 나섰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아, 고양이 이름이 정해지면 알려주시고요.”

 

직접 배웅을 나온 수의사가 닫히는 문틈으로 고양이의 간단한 정보가 기록된 종이를 팔락이며 나카지마와 고양이에게 인사했다. 어쩐지 수의사가 짓궂게 웃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지만 착각이겠지.

 

 

 

#2.

 

병원에서 가져온 사료를 그릇에 담아 내려주자 다행히 이번에는 고양이가 관심을 보였다.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혀를 내밀어 맛을 한 번 보고 곧 찹찹 소리를 내며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안도의 숨을 내쉰 나카지마는 쪼그려 앉았던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식사를 준비했다.

 

나카지마보다 일찍 식사를 마친 고양이는 이제 자신의 지정석이 된 책장 위로 올라가 그루밍을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느라 밥 먹는 것도 잊고 있던 나카지마는 고양이의 불만스러운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식사를 재개했다. 나카지마가 젓가락을 들고 다시 식사를 시작하자 고양이도 그루밍을 이어갔다.

 

 

‘아침, 저녁 식사 후에 주시면 됩니다.’

 

나카지마는 츄파춥스처럼 생긴 사탕을 들고 고민했다. 정말 이걸 줘도 되는 걸까. 병원에서 고양이는 치아 관리가 중요하지만 처음부터 양치질은 어려울 테니 ‘덴탈 캔디’로 시작하는 게 좋다며 서비스로 준 물건이었다. 나카지마가 고민하는 사이 어느새 책장에서 내려온 고양이는 그녀의 손에 들린 것이 자신의 것인 줄 이미 아는 양 빨리 내놓으라며 짧게 울었다.

 

“관심을 보이는 건 다행이긴 한데… 간식 아닌 걸 알고 내동댕이치면 어쩌지.”

 

걱정을 하며 포장지를 벗기는데 비닐의 바스락 소리에 고양이의 귀가 쫑긋 서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머리를 두어 번 쓰다듬은 뒤 사탕을 고양이에게 내주었다. 사탕을 물고 다시 책장 위에 높인 캣배드에 안착한 고양이는 능숙하게 막대를 앞발에 끼우고 사탕을 핥기 시작했다. 혹 고양이가 사탕을 몇 번 먹고 마는 것은 아닐까 염려했던 것이 무색하게 고양이는 열심히 사탕을 먹고 있었다. 그제야 안심한 나카지마는 휴대폰을 꺼내 사진을 한 장 찍었다. 찰칵 소리에 잠시 나카지마를 바라본 고양이는 이내 관심을 사탕으로 돌렸다.

 

휴대폰 속의 고양이를 바라보면 나카지마는 새로운 고민을 시작했다.

 

‘고양이 이름이 정해지면 알려주시고요.’

 

당분간이지만 임시보호를 하기로 결정한 이상 고양이의 이름을 정해야했다. 사실 병원을 나설 때 수의사의 한 마디가 아니었다면 나카지마는 계속 고양이라고 불렀을지도 몰랐다. 변명을 하자면 나카지마의 네이밍 센스가 별로라는 것과, 고양이라고 불러도 자신을 부르는 줄 알고 반응해주는 고양이 탓이 컸다.

 

“그냥 고양이라고 부르면… 안되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고양이라는 이름도 괜찮은 것 같은데. 야옹이 보다는 낫지 않나?’ 따위의 생각을 이어가던 나카지마는 휴대폰 속 사진이 아닌 실물의 고양이가 눈앞에 나타나자 바로 말을 바꾸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자신을 지긋이 바라보는 고양이의 눈을 마주하니 그래야 할 것만 같았다. 대신 고양이에게 말을 걸었다.

 

“고양아, 네 이름을 지어야 하는데… 네가 골라볼래?”

“냐아.”

 

스스로 말을 하면서도 어이없었던 나카지마와 달리 고양이는 이번에도 그녀의 말을 알아들은 듯 대답했다. 혹 나카지마가 알아듣지 못할까 걱정했는지 고개까지 끄덕여주며.

 

“음, 그럼 고양이…?”

“먕!”

 

미련을 버리지 못한 나카지마가 고양이라는 이름을 가장 먼저 꺼내보지만 단칼에 거절당했다.

 

“나비?”

“캬앙-!”

 

그 뒤로 야옹이, 까망이, 까망베르, 치즈 등의 이름을 이야기했지만 고양이의 반응은 단호했다. 나카지마의 헛발질에 고양이가 답답한 듯 자신의 가슴-턱시도 고양이라 불리는 이유인 가슴의 하얀 털이 있는 부분-을 두드렸다. 사람이 답답할 때 가슴을 두드리듯. 그걸 본 나카지마의 표정이 묘해지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이야기했다.

 

“턱시도…는 아닌 거 같고, 보타이…도 아니겠지. 그러면은 리본…?”

“냐아.”

 

‘하얀 리.본.이 참 잘 어울리는 아이네요.’

 

고양이의 눈치를 보며 하나씩 꺼낸 단어 중 ‘리본’이라는 말이 나오자마자 짧게 긍정한 고양이의 표정이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아 나카지마의 머릿속에 수의사의 말이 번뜩 떠올랐다. 설마 그때 수의사의 말이 마음에 들었던 거였어? 리본이면 대체 나비랑 뭔 차이인가 싶었지만 고양이 스스로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으니 그걸로 된 거겠지. 나카지마는 마음속으로 애써 납득하며 고양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고양아… 이름은 리본, 응, 리본. 한동안 잘 부탁해.”

 

마치 사람에게 악수를 청하는 것처럼 내민 손에 고양이 아니, 리본은 자연스럽게 앞발을 내밀어 나카지마의 손을 툭 건들었다. 나카지마와 리본의 동거가 시작된 둘째 날이었다.

 

 

 

#3.

 

새로운 식구가 들어왔다지만 나카지마의 공간은 크게 변한 게 없었다. 책장 위에 캣배드가 놓이고 식탁 옆에 리본을 위한 작고 낮은 식탁이 하나 더 자리한 것, 마지막으로 화장실 앞에도 리본을 위한 공간이 마련된 게 전부였다. 그래도 이전과 눈에 띄게 달라진 점이라면, 출퇴근 시에 인사할 상대가 생겼다는 정도일까.

 

“리본, 다녀올게.”

 

나카지마는 현관 앞에서 꼬리를 살랑대며 그녀를 배웅하는 리본에게 인사를 하고 출근길에 나섰다. ‘마음 같아서는 뽀뽀도 하고 싶지만 그건 리본이 싫어하겠지.’라고 생각하며. 자신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나카지마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 *

 

이름이 정해진 다음날 나카지마는 출근하자마자 병원에 전화를 걸어 고양이의 이름이 리본이 되었음을 알렸다.

 

‘귀여운 이름이네요.’

‘….’

‘그래도 잘 어울리는군요. 그 고양이에게.’

 

‘본인이 그 이름을 마음에 들어 하니 어쩌겠어요.’하는 나카지마의 속마음을 읽은 듯 수의사는 고양이와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며 나카지마를 위로했다.

 

“어머, 이름이 리본이야?”

“네, 사진 보시겠어요?”

 

병원과 통화를 마치자 관심을 보이는 동료들에게 나카지마는 어제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고양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미 고양이 집사인 한 동료의 조언은 수의사가 해줬던 이야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츄르와 캣닙을 선물해준다기에 감사한 마음으로 경청했다.

 

한 장 밖에 없는 사진이지만 리본이 사진 찍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는 말에 사람들은 쉽게 긍정했다.

 

“고양이 사진 찍기 어렵지.”

“맞아, 숨거나 잔상만 남고.”

“실물이 최고야.”

 

여건상 고양이를 기르지는 못하더라도 길냥이에게 밥 한 번씩은 줘본 적 있는 캣맘들은 즐겁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길냥이였으면 목욕 한 번 하는 게 좋지 않을까?”

“….”

“나카지마, 힘 내….”

“가끔은 얌전한 아이들도 있으니까, 아주 가끔이지만.”

“마침 주말이니까… 시도해봐야겠네요.”

 

나카지마의 한숨어린 말에 모두가 그녀를 응원했다.

 

* * *

 

퇴근길 다시 병원에 들러 목욕에 필요한 샴푸와 브러시 등을 추천해달라는 나카지마에 수의사는 굉장히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일그러진 얼굴은 웃음을 참는 것 같기도 하고 걱정을 하는 것 같기도 한 요상한 표정이었다.

 

“목욕, 이요…?”

“네, 길에서 지냈다면 목욕을 시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를 들어서요.”

“그건… 그렇기는 하죠.”

 

‘보통의 고양이라면 말이죠.’

 

그 리본이 과연 얌전히 몸을 맡기고 목욕을 할까. 마음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꾸욱 삼킨 사와다는 어쨌든 리본의 취향이라고 생각되는 것으로 골라 나카지마에게 고양이 목욕 용품을 추천했다. 물론 서비스로 ‘커피향 덴탈 캔디’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부디 에스프레소로 만든 사탕 뇌물이 리본에게 통하길 기도하면서.

 

“대체 리본은 무슨 생각이람.”

 

나카지마가 병원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보며 사와다는 아파오는 머리를 꾹꾹 눌렀다. 분명 자신이 언제까지 한가로이 이 병원을 지키고 있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 터인데, 리본을 되돌릴 방법은 아직 찾지도 못했는데. 리본은 사와다와 함께 성으로 돌아가길 거부하고 나카지마의 집에 눌러 앉았다.

 

나카지마 코토리. 그녀에게 이번 일을 풀 실마리라도 있는 걸까. 고양이가 된 리본이 거리에서 나카지마와 마주친 순간 고쿠데라에게 지시를 내린 사와다가 그녀에 대한 모든 정보를 보고 받기까지는 채 몇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만큼 이쪽 세계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와다나 수호자들과는 일면식이 없는 민간인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그녀가 리본과 어떤 접점이 있기에 리본이 나카지마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간 것인지 사와다는 스승의 생각을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아니면 스스로를 정말 고양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설마, 하는 생각을 하며 사와다는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일정을 조율했다.

 

 

 

#4.

 

“자랐군.”

 

하루 사이에 눈에 띄게 자란 리본을 보며 샤멀이 중얼거렸다.

 

“성장 속도가 비정상적이라는 걸 제외하면, 별다른 특이점은 없어. 아,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 다는 것도 추가해야겠군.”

 

히죽이는 샤멀의 반응에 리본은 당장이라도 총을 날릴 것 같은 표정을 지었지만 아쉽게도 현재 리본의 손은 총을 쥘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사무실이 난장판이 되지 않은 데 감사하며 사와다는 가장 중요한 사실을 물었다.

 

“방법은?”

“없어.”

“….”

“알 수 없는 빛이라며.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던 것도 아니고 원인을 분석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바로 어제, 적대 조직과의 항쟁에서 알 수 없는 빛이 리본을 향해 쏘아졌고, 눈부신 빛이 번쩍이고 난 자리에 나타난 건 까맣고 하얀 아기 고양이 한 마리였다. 레온과 별 차이 없어 보이는 크기의 고양이를 본 사와다는 갑작스런 빛에 모두가 멈칫한 사이 서둘러 레온과 함께 고양이를 낚아채 품안에 감추었다.

 

어디에서 나타난 빛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심지어 적들도 모르는 것 같았다- 리본이 고양이가 된 걸 알면 외부적으로도, 내부적으로도 혼란스러울 게 뻔했기에 사와다는 서둘러 현장을 정리하고 본고레 성으로 돌아와 아무도 모르게 샤멀을 찾았다.

 

고양이의 혈액과 털을 채취해 검사한 샤멀이 알아낸 사실은 지극히 단순했다. 그냥 고양이였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평범한 고양이. 하룻밤 만에 덩치가 두 배가 된 걸 제외하면 그랬다. 한숨을 내쉬는 사와다와 달리 리본과 샤멀은 침착했다. 그렇다면 뭔가 방법이 없지는 않다는 거겠지. 초직감 또한 잠잠했다. 내심 안도한 사와다의 마음에 재를 뿌리듯 샤멀이 코웃음 쳤다.

 

“이 속도면 고양이의 평균 수명을 생각했을 때 길어봐야 열흘이야.”

“…?!”

“야옹-.”

“리본…?”

 

샤멀의 심각한 말에도 리본은 관심이 없는지 문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명백한 나가겠다는 의사 표현에 사와다가 기겁하며 말렸지만 샤멀은 가차 없이 문을 열었다.

 

“샤멀!”

“본인은 방법을 알지도 모르지.”

“그게 무슨…! 리본!”

 

달려 나간 리본을 쫓아간 사와다는 덕분에 샤멀의 마지막 말을 듣지 못했다.

 

“그게 아니라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는 지도 모르고.”

 

* * *

 

리본은 얌전하고 조용한 고양이였다-고 나카지마는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생각했다. 리본과의 동거 3일째, 나카지마는 리본의 목욕을 시도했다.

 

욕실에 따뜻한 물을 받고, 샴푸와 수건을 준비하고, 헤어드라이기까지 잘 챙긴 나카지마는 며칠 되지 않았지만 지금까지 본적 없는 리본의 날카로운 반응에 당황했다. 쉬는 날인데 부산한 움직임을 보이는 나카지마의 모습에 뭔가 수상한 기색을 눈치 챈 리본은 그녀의 가슴높이에 오는 책장이 아니라, 그녀의 키보다 높은 냉장고 위로 훌쩍 올라가 털을 세웠다.

 

“리본?”

“….”

“리본, 괜찮아. 그냥 목욕을 하려는 거야.”

“흥.”

 

고양이가 코웃음을 쳤어…?! 고양이의 얼굴로 훌륭하게 코웃음을 지어 보인 리본은 나카지마에게 보여주듯 그루밍을 시작했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시위에 나카지마는 금세 리본의 목욕을 포기했다.

 

“그래, 네가 싫다면 다음에 하자.”

“미야옹-.”

“응, 그러니까 얼른 거기서 내려오자, 리본.”

 

나카지마의 부름에 가볍게 바닥에 착지한 리본은 헤어드라이어와 수건이 준비된 곳에 자리를 잡고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음, 빗질은 괜찮아…?”

“냐아-.”

 

어쩌다 이런 고양이를 만났는지. 이래서 운명의 고양이라는 걸까. 첫 만남부터 오늘까지 온통 리본에게 휘둘리기만 한 것 같아 나카지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리본, 널 어쩌면 좋니.”

 

계속 키울 자신은 없는데. 한 생명을 책임진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걸 나카지마는 잘 알았다. 일찍 부모님을 여읜 나카지마는 알 수 없는 이의 후원으로 무사히 대학을 졸업해 지금의 직장에 입사했다. 나카지마의 취직이 결정되자 익명의 후원자는 마지막으로 지금의 집을 나카지마에게 선물하고 연락을 끊었다.

 

졸업과 취직을 축하한다거나, 앞으로도 건강하게 열심히 잘 살라거나, 혹은 그동안 고생했다거나. 그 어떠한 말도 없었다. 부모님의 부재 뒤 후원자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리고 빠른 안정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카지마에게 이 관계의 완벽한 단절이 주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깊었다.

 

그리고 그 비어버린 공간에 들어온 것이 리본이었다.

 

“리본.”

 

나카지마가 서툰 솜씨로 조심조심 빗질을 하는 동안 얌전히 몸을 맡긴 리본은 그녀의 손에 머리를 비볐다. 쓰다듬어도 괜찮아. 리본의 신호에 나카지마가 빗을 내려두고 리본의 체온을 느끼며 마음을 달래는 동안 리본은 묵묵히 그녀의 곁을 지켰다.

 

 

 

#5.

 

주말은 금방 지나갔고 다시 리본을 두고 출근해야 하는 월요일이 돌아왔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는데, 어쩐지 출근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 머뭇거리는 나카지마를 나무라듯 리본이 현관 앞에서 꼬리를 탁탁 두드렸다.

 

‘출근해야지.’

 

리본이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말하고 있을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눈으로 보이는 말에 나카지마가 피식 웃었다.

 

“네, 네. 출근해야지.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나카지마는 오늘도 리본과 눈을 맞추고 인사한 나카지마는 씩씩하게 문을 나섰다.

 

* * *

 

“입양이요….”

“네. 기존에 동물을 키웠던 적도 있고, 고양이에 대한 지식도 해박해서 리본의 입양자로 적임자라고 판단돼서요.”

“다행, 이네요.”

“….”

“…내일 낮에, 리본을 데리고 병원으로 갈게요.”

 

상냥한 수의사의 탈을 쓴 사와다는 나카지마의 입에서 리본을 데려온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주었다. 통화를 끝내고 내일을 위해 연가를 신청하는 나카지마를 동료들이 위로했다. 아직, 운명의 고양이가 나타나지 않은 거라며.

 

하루 종일 나카지마의 마음은 이리저리 흔들렸다.

 

입양 공고를 조금 늦게 낼 걸 그랬나.

지금이라도 내가 키운다고 할까.

아냐, 좋은 집사가 나타났을 때 보내줘야지.

내가 책임질 자신도 없으면서.

그래도,

그래도….

 

퇴근시간이 되어 회사를 나서는 나카지마의 발걸음은 평소와 달리 더디고 무거웠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빨리 집에 가서 리본을 만나고 싶은 마음과, 지금 이런 기분으로 리본을 보면 펑펑 울어버릴 것 같아 조금이라도 늦게 들어가고 싶은 마음이 충돌했다.

 

아무리 걸음을 늦춰도 정해진 거리는 일정했고 결국 집에 도착한 나카지마는 또다시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시간을 보냈다. 안에서 리본의 울음소리가 들리기 전까지.

 

“야옹, 미야옹-.”

 

밖에서 망설이는 나카지마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하는 소리였다. 그 소리를 듣고서야 나카지마는 똑똑, 힘없는 노크를 하고 도어록의 번호를 눌렀다.

 

“리본, 다녀왔어.”

 

흐리지만 미소를 짓는데 성공한 나카지마가 인사했다.

 

* * *

 

충분히 윤기가 흐르고 가지런한 털이지만 혹시 몰라 두어 번 더 빗질을 하고 목에는 빨간색의 나비넥타이를 둘러주었다.

 

“멋있다, 리본. 잘 어울려.”

 

보타이까지 메자 정말 턱시도를 입은 양 리본에게 잘 어울려 와중에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리본이 이동장에 들어가기 전 그 모습을 사진에 담은 나카지마는 조금 더 몸을 숙여 촉촉한 고양이의 코를 자신의 코로 한 번 툭 건들고, 스쳐지나가듯 리본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마주했다.

 

“자, 이제 들어가자.”

 

그 작은 애정 표현에도 부끄러워 리본과 눈을 마주하지 못한 나카지마는 때문에 리본의 눈빛이 달라지는 걸 보지 못했다.

 

집에서 병원은 가까웠고, 금세 도착한 병원에는 이미 리본의 새로운 주인이 될 이가 먼저 와 있었다.

 

“아름, 아. 안녕하세요, 샤멀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나카지마 코토리입니다.”

 

헛소리를 하려는 샤멀을 순식간에 팔꿈치로 응징한 사와다 덕분에 나카지마는 정상적으로 샤멀과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수더분해 보이는 첫인상을 준 샤멀은 직업이 의사라고 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눈 샤멀이 리본을 안아들었다.

 

“이름이 리본-ribbon-이라고요?”

“네. 음, 믿기시지 않겠지만 리본이 스스로 고른 이름이에요.”

 

나카지마는 차마 자신의 네이밍 센스가 너무 엉망이어서 그런 것 같다는 말은 하지 못했지만 어쨌든 리본이 스스로 택한 이름인 건 분명했다.

 

“정말 잘 어울리는 이름이네요. 저도 계속 그 이름으로 부르고 싶군요. 아가씨께서 괜찮으시다면.”

“그, 물론이죠. 저야 그래주시면 오히려 감사한걸요.”

 

나카지마는 낯선 호칭에 잠시 당황했지만 리본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다는 말에 기쁜 마음을 담아 미소 지었다. 샤멀의 품안에서 어딘지 불쾌한 표정을 지어보이는 리본에게 나카지마는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리본, 앞으로도 건강하게 잘 지내자.”

 

리본이 고양이가 된지 7일째, 나카지마와 만난 지 6일째. 두 사람은 이별했다.

 

 

 

#6.

 

샤멀은 미련이 뚝뚝 떨어지는 표정으로 병원을 나서는 나카지마에게 빈말로라도 가끔이라도 리본의 소식을 들려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나카지마 역시 그러한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저 좋은 집사를 만났으니 이제 리본이 행복하게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건강하라는 인사 한 마디를 겨우 건넸다.

 

샤멀의 품에 안긴 리본의 표정이 좋지 않았던 게 마음에 걸렸지만, 그 표정을 보니 그래도 자신과 보낸 시간이 리본에게 나쁘지 않았던 모양이라며 위안 삼을 수 있었다.

 

나카지마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리본은 바로 샤멀의 품안에서 뛰쳐나왔다. 자신을 리본-ribbon-이라고 부른 샤멀의 옷에 고양이의 날카로운 발톱으로 쭈욱 스크래치를 내고서. 곧장 사와다의 어깨로 올라간 리본이 사와다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겨 본고레 성으로 돌아갈 것을 재촉했다.

 

본고레 성에 돌아온 리본은 성에 배정된 자신의 공간으로 향했고, 곧 사람의 모습으로 두 사람의 앞에 나타났다.

 

“돌아왔군.”

 

멀쩡히 돌아온 스승의 모습에 사와다가 안도의 숨을 내쉰 것도 잠시, 태평하게 담배를 물던 샤멀이 탕 소리와 함께 몸을 피했다. 샤멀이 몸을 피한 자리로 총알이 날아가며 담배를 반 토막 냈다.

 

“공주님의 키스라도 받았나?”

“샤멀!”

 

총알에 조금도 개의치 않은 샤멀은 도리어 즐거운 얼굴로 리본을 도발했다. 사와다가 질린 얼굴로 다급히 샤멀을 말려보지만 그의 스승은 이미 샤멀을 그냥 두지 않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날아다니는 총알에 몸을 피하며 사와다가 중얼거렸다.

 

“차라리 고양이가 좋았을지도….”

 

* * *

 

눈부시게 흰 셔츠와, 그에 대비되는 모든 색을 삼킬 것만 같은 검은색 턱시도. 그 안에서도 눈에 띄는 살짝 작은 듯 보이는 빨간색 보타이. 또, 손에는 분홍색 장미와 마카롱으로 만든 꽃다발을 한 손에 든 남자는 누가 봐도 애인을 기다리는 모습이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모습에 나카지마는 누군지 몰라도 굉장하다고 생각했다. 설마 그 굉장한 일이 자신에게 닥친 것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하고서.

 

“주웠으면 마지막까지 책임져야지.”

“네…? 저한테 하시는 말씀…인가요?”

 

품안에 들이밀어진 꽃다발을 얼결에 받아들고 고개를 두리번 거려보지만 몇 번을 둘러봐도 시야에는 눈앞의 남자와 자신밖에 없었다.

 

“미야옹-.”

“…?!”

 

남자가 중저음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고양이 소리를 내는 순간 나카지마는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 이 자리는 나카지마가 일주일전 고양이를, 리본을 만났던 그 자리였다. 마치 고양이가 사람이 된 것처럼 까만 정장과 하얀 셔츠와 장갑-까지 생각을 떠올린 나카지마의 시선이 황급히 남자의 목으로 향했다. 남자의 목에는, 나카지마가 리본에게 메어 주었던 것과 똑같은 보타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설마….”

 

차마 먼저 손을 내밀지 못하는 나카지마를 대신해, 이번에는 리본이 먼저 허리를 숙여 나카지마와 눈높이를 맞추고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운명의 고양이라고 하지.”

 

리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집사를 간택했다.

 

 

 

 

*운명의 고양이 : 가슴속에 로망의 고양이를 품고 살아가지만 실제 만나게 되는 고양이는 로망묘와는 전혀 동떨어진 고양이를 키우게 되는, 로망과 별개로 운명의 고양이는 따로 있다. 고양이에 전혀 관심 없던 사람이 냥줍하거나, 정말 키우고 싶어서 애쓰는데 뭔가 맞지 않아 키우지 못하다 엉뚱하게 만나게 되는 그런 경우 운명의 고양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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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for 원

다락 2015. 11. 15. 21:13

밤바람이 시원하다 자두가 달아지는 계절이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

폭풍이 몰아치고 장마가 쏟아지고 그늘이 소중해지는 볕을 맞이하는 여름.

먼 곳까지 선명히 아름다운 여름. 날의 꼬리가 길고 길어 유성우 같은 여름.

7월의 코 앞에서 맡는 별냄새.

 

여름 for

 

 

밤바람이 시원하다.

냉방을 하지 않으면 더운 집안과 달리 밖은 적당히 바람이 불어 선선한 날씨다.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내쉬자 세찬 비에 씻긴 맑은 공기가 온 몸으로 퍼져나간다. 바람이 가져온 시원한 공기 속에는 초록의 풀내음이 잔뜩 묻어있고, 가까운 듯 멀리서 들리는 풀벌레 소리는 귀를 간질였다.

역시 나오니까 좋다!”

뒤돌아보지 않아도 상대가 짓고 있을 표정이 눈에 훤했다. 어딘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을 게 뻔했지만 알게 뭐람.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팔을 뒤로 뻗어 손만 내밀자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쥐어주었다. 반짝반짝 윤기가 흐르는 자두는 얼핏 보면 천도복숭아 마냥 커다랬다. 이미 깨끗하게 씻어왔지만 매끄러운 표면이 예뻐 괜히 옷자락에 자두를 두어 번 문질렀다. 좋아, 분명 더 반질반질 해졌어! 뿌듯한 마음으로 자두를 크게 한입 베어 물자 새콤달콤한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달아. 맛있어!”

크다 해도 자두는 자두. 몇 번 먹지도 않았는데 금세 씨앗이 드러났다. 왠지 아까운 기분이 들어서 자두 씨앗을 들고 고민하자 옆으로 불쑥, 휴지를 내밀어 온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아니란 말이지.

이거, 심으면 자랄까?”

…….”

, !”

눈으로 한숨이라도 쉬듯 엄청 한심해 하는 표정이 확연했다. 씨앗이니까 심으면 날 수도 있지! 울컥한 마음에 한 마디 덧붙여 보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처음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나도 안다. 과일의 씨앗을 심는다고 무조건 싹을 틔우는 게 아니라는 걸. 혹여 싹이 올라오더라도 제대로 자라지 못한다는 걸. 그저 내가 바랐던 건.

 

 

정원에 자두나무를 심었으면 좋겠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정원 한쪽에 자리한 나무는 제법 컸지만 가지가 앙상해 무슨 나무인지 분별이 가지 않았다. 그래도 꽃을 보는 데에는 무리가 없을 거라는 정원사의 말에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꽃샘추위도 물러가고 완연한 봄이 되자 투박했던 나뭇가지에 하얗고 부드러운 꽃송이가 가득 매달렸다. 관상용으로도 적합하다더니 이래서였구나. 나뭇가지를 가득 채운 작은 꽃송이들은 벚꽃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다. 꽃송이만 가득했던 자리에는 곧 푸른 잎이 돋아나고 초록의 열매가 열렸다. 방울방울 맺힌 열매가 다시 노랗고 붉은 색으로 바뀌기까지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날 저녁 후식으로 자두가 올라왔다. 첫 수확한 것이라 크기도 작고 맛도 별로일 거라는 말을 들으며 제일 반지르르해 보이는 자두를 하나 집어 들었다. 와삭한 입 깨물자 새큼한 맛이 퍼져 나왔다.

으으, .”

내가 인상을 찌푸리는 것을 보며 미소 짓던 요리사는 남은 열매로는 잼과 파이를 만들 거라며 접시를 치웠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주지를 말지. 절로 불퉁해지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투덜거려 보지만 시큼한 맛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한참을 입안에서 맴돌았다.

 

먼 곳까지 선명하게 보이던 낮이 지나고 어둠이 내려앉았다. 모두가 잠들었을 고요한 시각, 창밖으로 정원에 켜진 은은한 조명을 잠시 바라보다 슬금슬금 방문을 나섰다.

정원에 내 키보다 커다란 나무는 의외로 몇 없는데 그 중 하나가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자두나무다. 고개를 들어 나무를 보자 드문드문 열린 자두가 눈에 들어왔다. 손을 뻗어 그나마 가까운 곳에 있는 자두 하나를 따 옷자락에 슥슥 문질러 닦았다. 낮에 먹었던 신맛이 떠오른 건 이미 손에 든 자두를 입 안에 넣은 뒤였다. 달지 않아. 여름인데도, 자두가 달지 않아.

새큼한 맛에 찔끔 눈물이 나오려는 기분이 들어 냉큼 눈을 위로 뜨고 한참을 깜박였다. 하지만 결국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리고, 흐려졌다 선명해진 시야로 길게 떨어지는 별똥별이 들어온다. 7월의 마지막 밤, 별님에게 빈 소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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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에게, 아짒

다락 2014. 9. 1. 23:25

노래와 이야기 | J에게

 

 

J 스치는 바람에 J 그대 모습 보이며 난 오늘도 조용히 그대 그리워하네

 

#1.

청명한 날이었다. 간밤에 내린 세찬 비는 혼탁했던 공기를 깨끗하게 해준 대신 봄의 따사로움을 앗아가 버렸다. 예상치 못한 서늘한 봄바람에 사람들은 부르르 몸을 떨며 가볍기 그지없는 봄옷의 옷깃을 여몄다.

이런 날이면 집사는 유독 잔소리가 심했다. 옷차림이 그게 무어냐며, 그렇게 얇게 입었다가 감기라도 걸려서 누굴 고생시키려고 그러느냐며. 하지만 잔소리 끝에는 봄 향기를 담은 노랑 스카프를 손수 아가씨의 목에 둘러주고, 가볍지만 따뜻한 외투를 건네던 집사였다.

아침에 서두르느라 스카프를 깜빡한 아가씨는 목에서 느껴지는 쎄한 바람을 그대로 느끼며 이게 다 집사가 챙겨줘 버릇해서 그런 거라고, 그러니까 집사가 나쁜 거라고 작게 원망하며 바삐 걸음을 옮겼다.

 

 

J 지난 밤 꿈속에 J 만났던 모습은 내 가슴속 깊이 여울져 남아있네

 

#2. 겨울

크리스마스였던가, 아니면 설날이었던가. 기억은 가물가물했다. 폭설이 내린 한겨울, 도심 외곽에 위치한 저택은 세상과 단절되었다. 그러나 유능한 집사의 선견지명으로 저택은 안전했고 또 이러한 상황에 대비해 만반의 준비를 모두 마친 뒤였다. 오히려 저택의 지붕 곳곳과 정원의 앙상했던 나뭇가지에 소복이 내려앉은 눈이 그야말로 눈부시게 빛나 눈의 여왕이라도 머물고 있을 것 같은 아름다운 절경을 자랑했다.

이에 오랜만에 동심으로 돌아간 어른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저택 밖으로 나와 한편에서는 눈사람을 만들고, 한편에서는 아가씨의 주도로 눈싸움을 시작했다. 기세 좋게 집사와 편을 가른 아가씨에게 동조해 평소라면 집사의 눈 한번 제대로 마주하지 못하던 고용인들이 집사를 집중 공격했다. 그 수많은 눈덩이를 요령껏 피하며 서늘하게 웃는 집사였지만 그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모두가 즐거워했다. 결국 집사가 아가씨의 솜방망이 같은 눈뭉치를 맞아주는 것으로 흥겨웠던 눈싸움이 막을 내렸다.

저택에 들어와 벽난로에 몸을 녹이며 따뜻한 차를 마시는 동안, 집사는 아가씨의 젖은 머리를 부드럽게 말려주었고 노곤해진 아가씨는 그대로 잠이 들었다.

 

또르륵

깊은 잠에서 깨어 이제 막 눈을 뜬 아가씨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떨어져 볼을 타고 귓가로 흘러내렸다.

왁자지껄했던 꿈은 굉장히 생생해서 오히려 지금이 꿈인 것만 같았다. 아가씨가 눈을 뜨면 제일 먼저 보이던 그 사람이,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현실에, 먹먹해지는 가슴속 깊이 그의 모습이 여울졌다.

 

 

J 아름다운 여름날이 멀리 사라졌다 해도 J 나의 사랑은 아직도 변함없는데

 

#3. 여름

더워어

더위에 지친 아가씨가 대리석 바닥에 눌어붙어 뒹굴었다. 시원한 대리석이 아가씨의 체온으로 뜨뜻미지근해지면 데굴데굴 굴러서 옆으로 이동하는 식이었다. 그런 아가씨를 걱정스레 바라보던 집사는 곧 한숨을 내쉬며 아가씨를 일으켜 세웠다. 아무리 더워도 제대로 옷을 갖춰 입고 있으라는 잔소리는 덤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던 아가씨는 마치 사막의 오아시스 같았던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방에서 집사에게 질질 끌려 밖으로 이동했다. 운동을 하고 오라며, 땀을 흘린 뒤 씻고 나면 한결 개운해질 거라고 말하는 집사는 굉장히 단호했다. 이런 목소리의 집사에게는 아무리 떼를 쓰고, 어리광을 부려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아는 아가씨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소심한 반항을 담아 아랫입술을 툭, 내밀어 부루퉁한 표정을 짓고 최대한 천천히 움직였다.

꾸역꾸역 억지로 운동을 마친 아가씨가 샤워를 하고 나왔을 때 집사가 준비한 것은 우유를 얼린 얼음을 갈아 만든 팥빙수였다. 팥빙수 하나에 온 세상을 다 가진 듯 만면에 행복한 웃음을 띤 아가씨가 집사 최고!’를 외쳤다.

 

 

J 난 너를 못 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J 우리가 걸었던 J 추억의 그 길을 난 이 밤도 쓸쓸히 쓸쓸히 걷고 있네

 

#4. 가을

가을에 사람이 쉬이 우울해지는 이유는 일조량이 적어서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이곳은 늘 흐려서 좀처럼 해를 보기가 쉽지 않았다. 날씨 탓인지, 아니면 공기가 나쁘기 때문인지 파란 하늘 또한 만나기 어려웠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 부슬부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한 달 가까이 진행된 학기말 시험에 지친 아가씨에게 이런 날씨는 더더욱 반갑지 않았다. 연이은 시험과, 과제와 토론으로 몸과 마음의 피로도가 극에 달했지만 어쩐지 이대로 기숙사에 돌아가기 억울해진 아가씨는 근처 공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런 날씨지만 그곳에 가면 조금 기분이 나아질 것만 같아서.

 

잎이 무성하지는 않지만 오래된 나무들이 여기저기 자리한 이 공원은 아가씨의 기억 속 그곳과 제법 유사한 느낌이었다. 다만 그곳에서는 단풍을 구경하며 두 사람이 손을 잡고 함께 걸었었고, 이곳에는 아가씨 혼자라는 것이 다른 점이었다.

아가씨는 벤치에 손수건을 깔고 앉아 보슬비를 맞으며 가만히 눈을 감았다. 한참을 그렇게 있던 아가씨는 머리가 온통 축축해질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으슬으슬해지는 것이 몸살감기가 오려는 모양이라 아가씨는 기숙사로 돌아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오십시오, 아가씨. 오실 때만을 기다렸습니다.”

기숙사에 다다랐을 때 익숙한 인영이, 아가씨가 기억하는 그 모습 그대로, 그녀가 이곳에 오기 전까지 늘 듣던 인사를 했다. 혹 자신이 너무 피곤해서, 아니면 그리워하는 마음이 너무 커져서 환영을 보고 환청을 듣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 아가씨는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환영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아가씨에게 한 걸음 더 다가와 도톰한 외투를 걸쳐주었다.

어딜 갔다 이제야 오십니까.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서.”

, ?”

여전히 어리벙벙한 아가씨에게서 가방을 앗아든 집사가 태연히 기숙사 문을 열었다.

아가씨 곁에 제가 있는 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간 혼자서 밥은 제대로 챙겨 드셨는지 모르겠군요.”

집사? 진짜 집사야?”

당당한 선언, 그리고 여느 때와 같은 잔소리였다. 그제야 현실에 로그인한 아가씨가 집사를 붙잡고 빽, 소리를 질렀다.

, 아가씨.”

혼자 걸었던 그 길을 이제 다시 당신과 함께.

 

 

[겨울, , 여름, 그리고 가을. 이만하면 충분한 시간이다. 당신이 나를 되새기고 그리워하기에. 당신이 나를 그리워하도록 만들기 위해 당신에 대한 그리움쯤은 참을 수 있었다. 이제, 다시 당신과 함께.] by 검은 집사

 

 

2014.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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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ject A & E

다락 2014. 8. 25. 18:53

Project A - 「愛、遠く(사랑,멀리)」 


어서 오십시오. 전 이곳을 지키는 케르베로스.

당신께서 스틱스 강을 무사히 건너기 위해 몇 가지 주의해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이 강 너머에는 세 명의 오르페우스가 상주합니다.

이 셋은 각자 다른 노래를 연주하지만, 그 노래를 듣기 위한 공통의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그들의 노래를 듣기 위해 당신께는 19년이라는 세월이 필요합니다.

19년을 채우지 못하신 분은, 죄송하지만 돌아가주십시오.

잘못하면 오르페우스의 노래가 당신께 독이 될 수 있으니까요.

이곳 지하 세계에 울려퍼지는 오르페우스의 노래는 원작이나 출판사등과 무관한 비공식 비영리의 2차 창작물입니다. 그 점 잊지말아주시길.

스틱스 강을 건넌 뒤에도 욕설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삼가주십시오.

만약 하데스를 분노케 한다면, 그가 당신을 스틱스 강으로 되돌려 보낼 수 있습니다

하데스께서 그리 결정하시면, 전 당신을 스틱스강 너머로 영원히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Project E


데메테르와 페르세포네의 성지(聖地) [Eleusis : elefsina]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곳은 ‘두 여신’을 기리는 밀의(密儀, Myein)가 행해지는 곳, 당신께서 성지 엘레우시스(엘레프시나)를 순례하시려면 데메테르께 밀의에 대한 서약(誓約)이 필요합니다. 엘레우시스(Telesterion)에서 이루어지는 비의(秘儀)는 원작이나 출판사등과 무관한 비공식 비영리의 2차 창작물로 의식에 관해서는 모두 비밀에 붙여지니 이점 명심해주시길.

 

엘레우시스는 신을 모시는 곳, 욕설이나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은 삼가주십시오. 또한 이곳은 1년 중 3분의 1을 명부(冥府)에서 보내는 페르세포네가 계시기에 지하로 향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합니다. 허나, 이곳 엘레우시스에서 지하세계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이로 인해 데메테르께서 분노하시면 당신을 더 이상 엘레우시스에 머물게 해드릴 수 없답니다.

 

게시판 : Telesterion(비의가 행해지는 건물)

회원등급 : 입교자-mystes(미스테스)

                작가-mystagōgos(미스타고고스)

                관리자-hierophantēs(히에로판테스)/dadouchos(다두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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