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다이바나시 :: , 이별, 얼음이 녹기 전

마나미 산가쿠 for 천가유

 

 

여름, 3일 간의 인터하이 끝에 하코네는 결국 왕자의 자리를 내주었다. 단순히 레이스 도중 스프린트 포인트를 내주어서 잠깐 선두가 바뀌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언제나 하코네의 자리라고 생각했던 15cm 높이 위의 왕좌에서 내려온 것이었다. 그것도 자신으로 인해.

자전거가, 언덕이 좋았던 건, 언덕을 오를 때 내뱉는 가쁜 숨만이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만끽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승리에 연연한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페달을 밟아 언덕을 오르는 게 즐거웠고, 자신과 같이 언덕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뻤다. 최선을 다했지만 승리한 것은 오노다였고, 오노다와 함께 달릴 수 있어서 좋았기에 웃으며 오노다의 승리를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눈물이 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졌다는 것, 하코네가 2위라는 것. 그 모든 게 처음이었고, 그만큼 생소하지만 절실한 감정이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이번이 모두가 함께할 수 있는 마지막 인터하이였을 선배들은, 왕자의 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준우승이라는 이름으로 졸업을 해야 하는 3학년 선배들은 오히려 덤덤했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었다. 내년에 왕자의 자리를 되찾아 오라고.

 

여름방학이 끝나고 2학기가 시작된, 후쿠토미를 주장으로 한 3학년들이 은퇴하기 바로 직전이었다.

진파치.”

신카이가 토도를 부르며 고갯짓으로 마나미를 가리켰다. 페달을 밟는 것에도, 부활동이나 수업에도 언제나 자유롭던 마나미였다. 가끔은 바보처럼 느껴질 정도로 언제나 해맑게 웃고 있었는데 요즘의 마나미는 그렇지를 못했다. 내년의 새로운 인터하이를 위해 후배들에게 바통을 넘길 채비를 하던 3학년들의 눈에 그런 마나미의 모습은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문제였다.

슬슬 준비 운동도 된 것 같고, 그럼 나가서 달려볼까나. 어이, 마나미. 이 산신님과 달릴 수 있는 영광을 주지.”

토도는 언제나처럼 거만하고 당당한 표정으로 마나미를 불렀다. 어쨌거나 토도에게도 마나미는 귀여운 클라이머 후배였으므로.

토도는 마나미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마나미와 함께 언덕을 오르고, 또 올랐다. 토도는 처음 소호쿠 합숙을 정찰하고 다녀와 반짝반짝 빛나던 마나미를 기억했다. 마키시마를 보라고 보냈건만 정작 마나미가 보고 돌아온 건 오노다였다. 토도는 자신에게 마키시마가 있었듯, 마나미에게도 오노다가 그런 존재이기를 바랐다. 분명 인터하이까지만 하더라도 그랬던 것 같은데……. , 말로 타이르는 것도 좋지만 페달을 밟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될 거라고 토도는 생각했다. 상냥하게 조언을 하는 건 아라키타에게 맡겨두자고, 토도는 정작 당사자가 들으면 어이없어 할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오르막을 향해 힘껏 페달을 밟았다. 마나미의 가슴에 스며든 얼음이 녹으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학생들이 하나, 둘 춘추복에서 동복으로 옷을 바꿔 입기 시작했다. 바스락거리며 발치에 치이던 낙엽들도 어느덧 모두 사라지고, 더 이상 떨어질 나뭇잎 하나 달려있지 않은 앙상한 가지들만 남아 겨울을 준비했다. 메마른, 그러나 폐 속 깊이 들어오는 깨끗하고 시원한 공기를 느끼며 마나미는 소호쿠로 향했다.

선배들이 여러모로 노력해 주었지만 마나미는 자신 때문에 하코네가 져버렸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는데 한참의 시간과 감정을 소비해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죄책감과 이별해야 할 때였다. 인터하이 마지막 날, 시상대에 오르기 전 후쿠토미 선배와 약속한 것을 지키려면 더 이상 이런 마음가짐이어서는 곤란했다. 오노다와 함께 다시 한 번 언덕을 오른다면 뭔가 달라질 거라는 느낌이 마나미에게 강하게 몰려왔다.

 

겨울이 되어서야, 마나미의 긴 여름이 끝을 보였다. 그리고 여름의 끝에 온 것은 가을이 아니라, ‘오노다 사카미치라는 새로운 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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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이바나시 :: 비 하늘 코스모스

아라키타 야스토모 for 셀레스틴(마키 카온)

 

 

[뭐하냐?]

마키의 휴대폰이 짧게 울었다. 발신인은 아라키타였다. , 던져진 짧은 메시지 한 마디에서도 아라키타의 톡 쏘는 목소리와 표정이 쉬이 떠오른 마키가 살풋 미소 지었다.

[도서관에서 공부중이야. 야스토모는 뭐해?]

[, 저녁은 먹었어?]

메시지가 전송되고 그제야 시간을 확인한 마키가 급히 덧붙였다. 배고프다는 생각도 들지 않을 만큼 공부에 집중했다는 사실에 조금은 뿌듯해 하면서 주섬주섬 책상에 늘어진 책들을 정리하는데 다시 휴대폰이 부르르 떨었다. 아마도 아라키타의 답일 거라 생각하며 책을 넣고 가방을 닫는데, 휴대폰의 진동이 멈추지 않았다.

야스토모

메시지가 아니라 전화가 온 것을 확인한 마키는 급히 가방을 메고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을 주며 전화가 끊길세라 종종걸음으로 열람실을 벗어났다.

잠깐만!”

학생증을 찍어 열람실 퇴실 처리를 한 뒤에야 휴대폰을 귀에 가져간 마키가 도서관이니 잠시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하려는 찰나, 아라키타가 마키의 말을 빼앗았다.

너 저녁 안 먹었어?”

아라키타가 물어오는 것의 내용은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어투는 그렇지가 않았다. 보통 때에도 찔레의 가시마냥 뾰족하기 일쑤인 아라키타의 말씨인데,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을 여실히 드러내는 말투에 움찔한 마키가 바삐 움직이던 걸음을 멈춰 섰다.

, 미안. 그게, 공부에 집중하다 보니까…….”

어째서 사과를 해야 하는지도 인식하지 못하면서 아라키타가 화를 낸다는 사실에 지레 놀란 마키가 사과와 변명을 늘어놓았다.

……. 우산은?”

? 우산?”

넌 일기예보 확인도 안 하냐? 거기서 얌전히 기다려.”

, .”

마키의 대답이 채 상대에게 닿기도 전에 전화는 끊겨버렸고 당황한 마키는 망연한 표정으로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밖에 비오나 보네…….”

열람실 앞을 벗어나 도서관 1층 로비로 올라가자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리는 학생들이 눈에 들어왔다. 개중에는 이미 비에 푹 젖은 것으로 보이는 학생들도 있어 굳이 창밖을 보지 않더라도 얼마나 비가 오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주었다.

[도서관 1층 로비야. 창가 쪽 책상에 있어.]

마키는 아라키타에게 메시지를 보내 자신이 있는 곳의 위치를 알린 뒤, 책상에 가방을 올려두고 창가에 붙어 섰다. 창문에는 굵은 빗방울이 부딪혀 떨어지고 있었고 하늘에는 시커먼 구름이 잔뜩이었다. 소나기였으면 좋겠지만 몰려온 구름의 양과 색을 보아하니 그리 금방 그치지는 않을 모양이었다.

도서관 로비에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어떡하지.’를 연발하는 목소리와 누군가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지 빠른 속도로 휴대폰 자판을 두들기는 소리로 가득했다. 아라키타가 아니었으면 자신도 저들과 같은 상황이었을 거라고 생각하며 마키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비가 내리고 있어서 야스토모가 나를 걱정했구나, 하고 기뻐하면서.

어이.”

야스토모!”

이 바보가. 정신을 어따 팔고 다니냐, .”

에헤헤. 고마워.”

아라키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는 마키의 표정이 반가움으로 가득한 것과 반대로 아라키타의 표정과 말은 험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쓰고 온 우산이 아닌 다른 우산을 마키의 손에 쥐어주고는 비어 버린 손으로 마키의 가방을 챙겨드는 아라키타의 행동은 말과 달리 다정함이 가득해서 마키는 배시시 웃으며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저녁 뭐 먹을래?”

, 야스토모 저녁 안 먹었어?”

왜 아직까지 저녁을 먹지 않았는가에 대해 실랑이를 하며 두 사람은 각자의 우산을 펼쳐 들었다. 결국 함께 오코노미야끼를 먹으러 가기로 결정한 발걸음은 우중충한 날씨와 달리 가벼웠고, 마키의 우산에 작게 그려진 코스모스가 거센 빗줄기 속에서 가볍게 흔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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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 마나미 산가쿠 @kaihuayul

 

역시 토도. 인기 많은데?”

한 무리의 여학생들이 꺄악거리는 소리를 내며 휩쓸고 지나간 뒤, 남겨진 토도의 손에는 이런저런 선물들이 들려있었다. 가볍게는 초콜릿이나 사탕부터 나름 신경을 썼을 법한 직접 담은 레몬청까지. 물끄러미 토도의 손에 들린 것들을 바라보며 가볍게 토도를 놀리던 하루노의 눈에 평소와 다른 물건이 들어왔다.

? 이건 뭐야?”

맑은 날 땀을 뻘뻘 흘리며 산 정상에 다다랐을 때, 툭 트인 시야 가득 들어오는 하늘의 색을 담은 머리띠였다. 머리띠를 모으고 있고 평소 여러 개의 머리띠를 휴대하며 마음 내키는 것을 사용하는 토도지만, 그렇다고 토도가 자신의 머리띠에 리본을 곱게 매어두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저건 누군가 포장의 의미를 담아 리본을 둘러 토도에게 선물한 머리띠라는 소리였다.

하루노는 머리를 기르거나 머리띠를 하는 남자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 자체야 개인의 취향이라고 생각하지만 가까운 누군가가 그런다면 질색이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토도는 달랐다. 어중간한 길이의 단발은 토도에게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운동부이면서도 엉킴 없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결 좋은 머리칼은 늘 부드럽게 찰랑거렸다. 머리 위에 자리한 머리띠는 토도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런 토도에게 누군가 머리띠를 선물한 것이었다. 산신山神이라 불리며 여러 크고 작은 대회에 출전해 수차례 산악상을 받아온 클라이머 토도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하늘색의 머리띠를.

누군지 몰라도 센스 있네.”

그렇지? 이 몸에게 잘 어울…….”

그런데 그 센스가 머리띠를 고르는 데만 발휘된 모양이야. 그거, 토도한텐 별로 안 어울리는 걸.”

. 그럴 리가!”

머리띠는 예뻐. 엄청 예뻐!”

그럴 리 없다며, 내가 소화하지 못하는 머리띠는 없다며 펄쩍 뛰는 토도를 보고 하루노가 까르륵 웃었다. 그리고 창가에서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마나미가 중얼거렸다. ‘거짓말쟁이.’라고.

하루노는 늘 그랬다.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것도 토도가 좋아하는 것이라면 괜찮다 말했고,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라도 토도가 좋아하지 않는 것이라면 무심한 표정으로 흥미 없어 했다. 토도는 눈치 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마나미의 눈에는 하루노의 거짓말이 금세 들어왔다. 하루노가 토도라는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라면, 자신은 하루노라는 달을 바라보는 달맞이꽃이었다.

 

 

쓰다가 귀찮아져서 급 마무리. 본래라면 하루노의 거짓말이 이어지고 매번 그걸 알아차리는 마나미와, 토도에게 장난식으로 좋아한다고 말하는 하루노와 그게 진실임을 아는 마나미가 나와야 하지만 이건 전력이니까...라며 패스. 뭐, 그렇다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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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자리, 신카이 하야토 @kaihuayul

 

늘 함께였다.

옆집, 그리고 신혼부부. 집이 가깝다는 걸 핑계로 곧잘 어울리곤 하던 두 부부는 아이도 엇비슷한 시기에 가졌다. 그게 너와 나의 시작이었다. 두 아이도 분명 좋은 친구가 될 거라며 엄마, 아빠들은 기뻐했다. 태교도 함께 했다며 그때의 일을 이야기하는 엄마는 즐거워 보였다. 부모님의 바람대로 너와 나는 엉금엉금 기어 다니기도 전부터 마치 한 뱃속에서 태어난 것 마냥 항상 붙어있었다. 둘 중 한 명이 보이지 않으면 서로 울어대는 통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아느냐며 엄마는 짓궂은 웃음을 지었다. 집안 곳곳 늘어나는 액자에 담긴 사진에도, 하나, 둘 늘어가는 앨범에 담기는 추억에도, 너와 내가 홀로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빽빽 울다가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일그러진 웃음을 짓는 사진, 뒤뚱뒤뚱 걷다 넘어진 나를 네가 일으켜주는 사진, 똑같은 옷을 입고 손을 마주잡고 찍은 사진, 초등학교 입학 사진, 운동회와 소풍 사진, 졸업 사진과 다시 입학 사진…….

그렇게 늘, 함께할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릿카이대 부속 고등학교로 진학할 거라고 생각했던 네가 하코네 학원에 입학 원서를 제출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느낀 건 배신감이 아니라 슬픔이었다. 더 이상 함께할 수 없다는.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교과서로 수업을 듣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공유할 수 없다는 상실감.

?’라고 묻지 않았다. 그건 이유를 추궁한다 해서 선택을 되돌릴 수 없다는 부질없음 때문이 아니었다. 데칼코마니라고 생각했던 너와 내가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을 뿐이었다. 끼익, 하는 소리를 내며 맞물린 톱니바퀴가 처음으로 움직였다.

오랫동안 멈춰있던 톱니바퀴는 녹이 슬어 매끄럽게 굴러가지 못했다. 녹을 제거하고 기름칠을 하고 윤기가 반질반질 흐르도록 손질을 해 주어야 할 텐데, 톱니바퀴의 존재를 이제야 알아챈 나에게 그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로드 레이싱 명문고인 하코네 학원에서 2학년으로는 이례적으로 네가 인터하이 멤버에 선발되었었다는 걸, 그리고 네가 한동안 자전거를 타지 못했다는 걸, 내가 전해들은 건 그 다음해였다.

 

 

로드 레이싱(road racing) : 도로 코스에서 행하는 레이싱. 사이클링에서, 로드 레이싱 참가자들은 가벼운 10-스피드 또는 15-스피드 자전거를 사용한다.

 

로드 레이싱이라는 분야가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찾아본 정의는 그러했다. 자전거로 시속 50km 이상을 내기도 한다는 로드 레이싱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자전거로? 믿어지지 않았지만 사실이 그러하다고, 찾아본 자료들이 말해주었다.

위험할 것 같다는 생각은 들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하야토, 네가 보고 싶어. 네가 자전거 타는 모습을 보고 싶어.’

 

 

 

너는 상냥했다. 내 심술에 곤란한 듯 웃으면서도 결국은 내가 하고 싶은 데, 내가 원하는 것을 내 손에 쥐어주었다. 동갑일 뿐인데 마치 네가 내 누나 같았다. 그걸 믿었는지 부모님들은 너와 나만 남겨두고 늦게까지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았고, 너와 내가 중학생이 되자 심지어 남자와 여자인 우리 둘만을 집에 남겨두고 여행을 가버리기도 했다. 그럴 때면 너는 하야토, 나 혼자 밥 먹기 싫은데 와서 같이 먹어주면 안 돼?’라고 상냥하게 물었다.

자전거를 타게 되었다. 가볍게 산책을 하는 정도의 자전거가 아니라 경기를 위한, 로드 레이싱을 위한 자전거였다. 그래서 네게 말할 수 없었다. 로드 레이싱이 위험한 것이어서, 단순히 네가 걱정할까봐 말하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너는 걱정하겠지만 다정한 너는 그 걱정에 내가 신경 쓸 것을 염려해 오히려 웃을 테니까. 혼자 속으로 마음 아파할 너를 뻔히 알면서 또 어리광을 부릴 수는 없었다.

그때부터였다. 언제나 함께였던 우리가 달라진 건. 모든 것을 공유하던 우리 사이에서, 네게 비밀을 만들어버린 나는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

 

[하코네 학원에 입학하게 될 거라고 네게 알렸던 날, 언제나 해맑게 웃고 있던 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졌다.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금방이라도 사라져버릴 듯한 흐릿한 미소. 오랫동안 고정되어있던 너와 나의 관계는 실타래가 엉키듯 꼬여버렸고, 나는 네 앞에서 도망치듯 기숙사 통학을 선택했다. by 청연]

 

 

인터하이 주전 멤버가 되었다. 작년 인터하이 멤버로 선발되었지만 트라우마로 인해 레귤러 자리를 사퇴했던 내게 다시 돌아온 소중한 기회였다. 후쿠토미가 지켜주고 아라키타와 토도가 기다려주었다. 그것은 꽤 생소한 감각이었다. 미안하고 어색한 마음에 머뭇거리는 나를 아라키타가 거세게 반겼다. 그 익숙한 언행에 안도감이 몰려왔다. 토도의 가벼워 보이는 웃음은 매우 편안했다. 진지한 후쿠토미의 표정은 시간의 흐름을 잊게 했다.

내가 있어도 되는 구나. 내가 있을 곳이 여기구나.’

그렇게 네가 떠올랐다. 너도 그러할까. 만약 그렇다면, 그러하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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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주는 꽃, 신카이 하야토 @kaihuayul

 

2학년으로는 이례적으로 인터하이 주전 멤버에 선발되었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주전 멤버 자리를 사퇴하고 부 활동을 접다시피 했던 신카이가 부에 돌아왔다. 사람이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신카이의 부재 속에 그를 기다렸던 동료들은 아무런 이질감 없이 신카이의 자리를 받아들였다. 이제야 하코네 학원 자전거 경기부가 온전해졌다고 생각하는 것도 같았다.

그렇게 돌아온 신카이는 연습 전후로, 혹은 연습 중에도 종종 부실 건물 뒤편으로 사라지고는 했다. 가끔은 후쿠토미도 함께였다. 또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걱정이 되었지만 그렇기에 함부로 신카이의 행보에 제지를 하지도, 혹은 건물 뒤편에 가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후쿠토미가 아무 말이 없었고, 신카이에게서 예전과 같은 불안한 기색이 보이는 것은 아니었기에 그저 모른 척 넘길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연습이 시작하기 전에 평소처럼 건물 뒤편에 다녀온 신카이의 표정에 근심이 내려앉았다. 그걸 본 이즈미다는 어쩔 줄 몰라 했다. 끙끙거리며 제대로 연습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즈미다의 뒤통수를 아라키타가 휘갈겼다.

정신 사나워! 그렇게 걱정되면 가서 물어보던가!”

, 그래도 될까요? 아니, , …… 아라키타 선배가 물어봐 주시면…….”

아라키타의 말에 반색을 하던 이즈미다가 이내 시무룩해지더니 아라키타를 보며 애원했다. 평소 근육을 외치는 이즈미다의 울망한 표정에 아라키타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아라키타는 사내자식의, 그것도 징그러운 근육을 가진 부 후배의 애교 따위를 보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하아? 내가 왜!”

푸핫. 귀여운 후배의 부탁이니 내가 나서볼까나!”

그런 둘 사이를 제지하며 토도가 부실 평롤러대에서 연습중인 신카이에게 향했다.

어이, 신카이! 오늘 왜 그렇게 죽상이야?”

, 그게…… 토돌이가 자꾸 설사를 해서.”

? 토돌이?”

, 내가 말 안했던가? 토끼 키운다고.”

전혀. 처음 듣는데!”

토도가 신카이에게 뭐라고 물어볼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도 되어 부실로 따라 들어온 아라키타와 이즈미다도 신카이의 대답을 들었는지 곧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감독님과 이야기를 마치고 뒤늦게 부실에 들어온 후쿠토미까지 합세해 그간의 사정을 들은 멤버들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다함께 건물 뒤편으로 이동했다. 그 귀한 토끼 얼굴 좀 한번 보자면서.

 

[상추, 양배추, 배추 등은 토끼가 좋아하는 야채지만 물기가 많고 영양가가 별로 없어서 많이 먹으면 설사를 할 수 있다고 해. 가끔 별식이나 간식 정도의 느낌으로 주는 게 좋대. 설사에 약한 토끼들이니까 살짝 말린 당근을 추천합니다.]

뭐야, 이건?”

토끼풀이 그려진 편지지에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로 쓰인 메모, 그리고 메모에 적힌 설명처럼 조금은 말라버린 당근 하나가 토돌이의 케이지 앞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정체불명의 메모와 당근을 이리저리 돌려보지만 그런다고 답을 알 수 있는 건 아니었기에 그들의 관심은 곧 토돌이에게 옮겨갔다.

이게 토돌이? 못생겼는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토도는 능숙하게 토돌이를 쓰다듬었다.

됐고, 그래서 너 지금까지 뭘 먹인 건데?”

토도와 이즈미다가 토돌이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다시 한 번 메모를 흘깃 쳐다본 아라키타가 신카이에게 물었다.

그냥 이것저것……?”

……알만하고만.”

결국 토돌이가 설사하는 이유를 알아낸 멤버들은 신카이를 타박했다. 예뻐할 거면 제대로 알고 예뻐하라며.

 

[당근 이외에 먹을 수 있는 야채는 청경채, 치커리, 미나리, 신선초, 무청 등! 그리고 클로버, 칡잎, 질경이, 아카시아 같은 것들도 먹을 수 있지만 개의 배변이 묻은 식물, 사람과 차가 많이 다니는 곳에서 채취된 식물은 오염이 되어 있기 때문에 몸이 약한 토끼들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니 항상 유의할 것!]

그리고 다음날 토돌이의 케이지 앞에는 어제와 같은 메모지와 함께 청경채 한 다발이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그리고 그건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설명 한 가지와 토끼가 먹을 수 있는 야채나 풀 혹은 과일 한 종류. 메모지는 언제나 토끼풀이 그려진 편지지였다.

그렇게 토끼풀 편지지의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채 일주일이 지나 학교가 쉬는 토요일이 되었다. 수업은 없지만 기숙사에 사는 자전거 경기부 멤버들은 주말에도 연습을 쉬지 않았다. 평일보다 긴 시간을 연습에 집중할 수 있어서 오히려 멤버들은 신이 나는 모양이었다.

연습 시간이 길어지는 만큼 쉬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각각 달랐다. 레이스 코스를 한 바퀴 돌고 온 신카이는 잠시 휴식을 가질 겸 토돌이를 보러 건물 뒤편으로 향했다. 그리고 어김없이 케이지 앞에 놓여있는 무언가. 그런데 오늘은 조금 달랐다. 언제나의 편지지가 보이지 않고, 대신 깨끗하게 씻어서 말린 것으로 보이는 토끼풀과 여러 개의 토끼풀 꽃을 엮어 만든 꽃다발이 곱게 놓여 있었다. 그리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조그마한 돌로 눌러둔 네잎 클로버까지.

토돌이에게 토끼풀을 먹이면서 신카이는 다짐했다. 일주일 동안 토돌이에게, 아니 자신에게 선물을 보낸 범인을 꼭 찾아야겠다고. 오늘 아무런 메모 없이 토끼풀만 놓여있었다는 건 아마도 상대가 더 이상 토돌이의 먹이를 이곳에 가져다 놓지 않을 거라는 의미일 터다. 그렇다면 상대가 다시 이곳을 찾을 수밖에 없도록 만들면 되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신카이는 미소 지었다. ‘되돌려주는 선물로는 역시 토끼풀 꽃이 좋겠지.’라고 중얼거리며. 신카이의 중얼거림을 들은 토돌이가 귀를 쫑긋 거렸다.

 

토끼풀의 꽃말은 약속, 행운,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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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기다리는 시간, 토도 진파치 @kaihuayul

카나가와현에 위치한 하코네 학원. 작년 인터하이에서 우승을 차지한 하코네 학원은 누구나가 아는 로드 레이싱 명문 고교였다. 로드 레이싱이 대중화된 스포츠가 아닌데다,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기에 자전거 경기부가 있는 학교는 드물지만 하코네 학원은 달랐다. 하코네 학원에서 로드 레이싱을, 그리고 나 ‘토도 진파치’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터였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고 분명 그러해야 맞았다. 그런데, 그런데……!
“정말로 나를 모른단 말이야? 이 토도 진파치를! 솔직히 말해봐. 너, 하코네 학원 학생이 아니지!”
‘범인은 바로 당신!’이라는 느낌으로 토도가 상대방을 가리키며 외쳤다. 자신의 추측이 분명 맞을 거라는,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자신감어린 태도였다.
“음, 그러니까 토도 선배? 저 하코네 학원 학생 맞고요, 우리 학교가 로드 레이싱이 유명한 것도 알고는 있는데 말이죠…….”
자신 없다는 듯 느릿느릿 변명의 말을 이어가는 여학생의 얼굴에는 난처한 미소가 걸려 있었지만 토도는 그런 표정에 아랑곳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저기, 그럼 저는 이만 가볼…….”
“좋아! 오늘 방과 후에 자전거 경기부에 오도록. 특별히 내가 견학을 시켜줄 테니까, 이 몸의 아름다움을 잘 느끼도록 해!”
“네? 저기, 잠깐만……!”
이미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토도는 일방적으로 약속을 잡고서 파핫핫―하는 가볍고 경박해 보이는 웃음소리를 내며 멀어져갔고, 그런 토도를 붙잡으려는 여학생의 시도는 허무한 실패로 끝났다.
“으아아, 뭐지 저 선배?”
자신은 단지 점심을 먹고 여유롭게 산책을 하고 싶었던 것뿐인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산책을 하기에는 더운 날씨라 혼자 나온 게 문제였을까, 아니면 인적이 드문 뒤뜰을 산책한 게 문제였을까.
하코네 학원이 로드 레이싱으로 유명한 것은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연스레 알게 되었다. 부원도 많고, 여러 대회에서 우승도 자주하니까 학교 이름을 빛냈다며 누군가 단상에 올라가 상장을 받는 것도 종종 보아왔다.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자전거 경기부의 부원을 모두 알고 있어야 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응, 그렇지만 저 선배 일단 잘생기긴 했고, 스스로도 아름다움이라고 말하는 거 보니까 얼굴로 유명한 걸까나…….”
토도가 들었다면 경악을 금치 못할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여학생은 교실로 걸음을 옮겼다. 토도를 상대하느라 급속도로 피곤해진 심신은 산책에 대한 아쉬움을 가볍게 날려 버렸다. 그보다 문제는 자전거 경기부의 부원으로 보이는 저 선배가 통보하고 간 약속이었다. 일방적이긴 했지만 어쨌든 선배의 말이고 하니, 조금 번거롭기는 하지만 방과 후에 가서 제대로 거절하고 오는 게 좋으리라.

“진파치?”
오늘따라 어수선하게 구는 토도를 신카이가 의아함을 담아 불렀다. 성격이 급한 아라키타가 버럭, 화를 내기 전에.
“와핫핫. 마키짱이 또 전화를 받지 않아서 그만.”
“뭐야, 저 바보는.”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빈정거린 아라키타가 먼저 로커에 짐을 넣어두고 탈의실을 나섰다.
“그쪽도 연습 시작했나 보지. 나 먼저 갈게.”
신카이도 부드럽게 웃으며 서둘러 아라키타를 따라 나갔다. 혼자 남은 탈의실에서 토도는 패닉에 빠졌다. 어째서 신카이와 아라키타에게 거짓말을 했을까. 지금 자신이 이러는 이유는 마키시마와의 통화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 점심시간에 있었던 일은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늘 자신만만했고 자신의 능력과 미모를 믿었다. 그렇기에 당연히 팬클럽도 있는 것이고. 그렇다고 해서 하코네의 모든 학생들이 토도 진파치를 아는 게 아니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 수 없는 건……,
“대체 내가 왜 그 여자애를 오라고 한 거지?”
양손으로 머리를 부여잡으며 토도는 비명을 질렀다.
점심시간에 뒤뜰에서 만난 여학생과 멀어지면서, 점심시간이 끝날 때까지, 오후 수업을 듣는 내내, 그리고 곧 연습을 시작해야 할 지금까지 계속, 계속 생각했지만 여전히 답을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일방적으로 이야기한 것이기에 설마 그 여학생이 올까 싶지만, 그렇다고 오지 않으면 또 굉장히 서운할 것 같았다.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뒤늦게 드는 후회 속에 토도는 또 한 번 절규했다.
“아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응, 그 아이 착해 보였고……. 앗, 혹시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으면 어떡하지? 그냥 간 거 아냐?”
서둘러 트레이닝복으로 옷을 갈아입은 토도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로커 문을 급히 닫으며 탈의실 문을 열고 나와 부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것도 같았지만 무시했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을 때 토도의 눈에 들어온 것은 부원들의 연습을 방해하지 않도록 건물 벽 한쪽에 얌전히 서서, 그러나 여전히 어색함과 난처함을 담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 여학생이었다.
‘아아, 와줬구나.’
토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이유는 아무래도 좋았다.
“안녕! 다시 소개할게. 난 토도 진파치, 네 이름은?

 

산다이바나시, 토도 진파치 for 청연 http://kaihuayul.tistory.com/14 로 이어집니다.

 

 

Posted by De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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