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가슴앓이
시작은 별것 아니었다.
등굣길에 가끔 스쳐지나가며 보았던 얼굴이 사실은 학교의 유명 인사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고 해서 그녀의 일상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니까. 그저 지나가다 이름이 들리면 한번쯤 귀를 기울이게 되고, 어디선가 얼굴이 보이면 한 번 눈길을 주거나 홀로 조금 더 반가워하는 그런 정도였을 터였다.
“우리 학교 테니스부가 도대회 결승에 올라간 건 다들 알고 있지? 학교에서 단체로 응원을 가기로 했으니까 관심 있는 학생들은 반장한테 신청해라. 일정 인원이 모이지 않으면 학급 임원들은 강제 참가니까 참고하고.”
아침 조회를 마치며 담임이 남긴 말에는 한 귀로 듣고 흘리기에는 반갑지 않은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엑, 싫다. 테니스면 야외시합이잖아. 이 날씨에 야외에서 응원이라니 분명 더위 먹을 거야.”
“테니스부 인기 많으니까 간다는 애들 많지 않을까?”
“아니면 레귤러들이랑 같은 반 애들 있잖아……!”
“그런데 얼마나 모여야 하는 거야?”
“글쎄…….”
모두 사토를 바라봤지만 학교에서도 오늘 아침에서야 결정된 사안인지 반장인 그녀도 딱히 담임에게 들은 이야기가 없는 모양이었다. 대다수의 관계없을 친구들과 다르게 서기인 하루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신청자가 많기를 바라는 수밖에.
날씨와 관계없이 점심시간의 교실은 활기가 넘쳤다. 아침 조회시간에 나온 이야기 덕분인지 오늘의 대화 소재는 대부분 테니스부인 모양이었다. 친구들의 후지가 미인이라든가, 1학년 루키가 제법이라든가, 그래도 역시 부장인 데즈카가 제일이라든가 하는 테니스부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하루노는 교내 신문에 실린 테니스부 인터뷰 기사를 천천히 읽기 시작했다.
“데즈카 잘 생겼지?”
“데즈카?”
“응, 거기 선생님처럼 생긴 남자애.”
“사토 쨩 너무 가차 없어.”
“사실이잖아. 그나저나 신문부 신났겠네.”
“응, 오늘 신문 보는 애들 많더라. 평소보다 많이 찍었나 보던데 추가 분량까지 다 나간 모양이야.”
“사진 담당이 모리였나? 아무래도 사진 영향도 좀 있을 거 같고……, 우리까지 안가도 되겠다.”
사토가 응원 참석 신청자 명단을 보며 중얼거렸다.
“아, 사토 쨩은 가야될걸?”
“왜?!”
“아까 교무실 갔을 때 선생님들 얘기하시는 거 얼핏 들었는데 각급 반장들은 의무참가라는 거 같아.”
“말도 안 돼!”
절망하며 책상위에 늘어지는 사토를 다독이며 하루노는 잠시 고민했다. 사실 대회가 일요일에 치러지는 만큼 참여율이 저조하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미 하루노는 다이어리에 일정을 적어둔 참이었다.
“같이 갈까?”
“정말?!”
“으앗, 사토―!”
하루노의 제안에 사토가 벌떡 일어나며 책상이 덜컹거렸다.
“미안, 미안. 하루 쨩 진짜지? 응? 응?? 번복하기 없다!”
하루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사토는 하루노의 손을 덥석 잡아 이끌었다.
“아아니, 지금 당장 이거 내러 가자!”
“사―토 쨩. 이거 굳이 신청하지 않아도 상관없잖아? 이미 최소 인원은 넘긴 거 같고.”
“아……. 그렇구나.”
“그보다 슬슬 이동해야겠는걸.”
더운 날씨 탓인지 평소보다 반응이 느린 사토를 두드리며 하루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친구들에게 인사했다.
“벌써?”
“응, 교무실 들렀다 가려고.”
“오케이. 그럼 이따 봐.”
“아, 나도 같이 가!”
교무실에 들른다는 하루노의 말에 사토도 얼른 자신의 자리로가 음악책을 챙겨들었다. ‘ㄷ’자 모양의 본관 가장 바깥쪽에 위치한 하루노의 반은 음악실이나 미술실과 같은 특별실이 있는 별관과 바로 연결되는 구름다리가 있었지만, 교무실과는 거의 반대편에 자리하고 있어서 교무실을 들렀다 가려면 건물을 한 바퀴 뺑 돌아야했다.
“어, 데즈카다.”
교무실에서 막 나오던 데즈카를 발견한 사토가 크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두 사람에게 인사하는 데즈카는 신문에서 봤던 것 그대로의 단정하고 반듯한 얼굴이었다.
“그거 영어 노트야?”
“음, 수행평가 채점이 끝났으니 가져가라고 하셨다.”
“그럼 우리 반도 곧 주시겠다. 아참, 데즈카 축하해! 우리도 응원 갈게!”
데즈카가 들고 있는 노트를 보고 질문하는 사토를 뒤로 하고 역시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 데즈카에게 인사한 하루노는 먼저 교무실로 들어섰다. 테니스부의 도대회 결승 진출을 축하하며 응원을 가겠다는 말에 데즈카의 시선이 잠시 하루노에게 머물렀지만 그런 데즈카의 시선을 친구가 기다리지 않느냐고 오해한 사토는 괜찮다며 데즈카의 어깨를 두드려 몇 마디 응원의 말을 덧붙였다.
하루노가 담임에게 학급일지를 제출하고 테니스부 도대회 응원과 관련된 이야기를 마치고 나올 때에야 사토는 데즈카의 손에 들린 노트의 무게를 걱정하며 그를 자신의 반으로 돌려보냈다.
“반장은 필참이고 신청은 더 안 받아도 된대. 아마 봉사활동 점수 같은데 반영할 모양이야.”
“엣, 그럼 하루 쨩도 이름 써야 하는 거 아냐?”
“사토 쨩이랑 데이트하는 셈 치지 뭐.”
“하는 셈이 뭐야, 하는 셈이!”
진짜로 데이트를 하자며 맛있는 걸 사줄 테니 기대하라는 사토의 호언장담에 까르륵 웃는 하루노의 웃음이 교무실 앞의 조용함을 타고 복도로 퍼져나갔다. 그 소리에 머무는 시선이 있었지만 이미 계단을 내려선 두 사람에게는 미처 닿지 못했다.
“데즈카, 뭐 해?”
노트를 들고 교실 앞 복도에 서 있는 데즈카를 본 같은 반 친구가 의아하게 물었다. 데즈카는 자신을 부른 친구에게 노트를 부탁한다며 건네고는 다시 창밖을 보더니 곧 몸을 돌려 움직이기 시작했다. 수업 시작 전에 화장실이라도 가려나보다 생각한 친구는 바로 교실로 들어가며 급우들에게 노트를 찾아가라고 외치느라 데즈카가 향한 방향이 별관으로 가는 길이라는 걸 알 수 없었다.
◇ ◇ ◇
“장미?”
“5월하면 역시 장미지! 장미축제도 열리고 곧 로즈 데이잖아?”
“장미 예쁘지…….”
“그치, 그치! 게다가 하루 쨩은 이름에서부터 꽃이 잘 어울리니까. 봄 하면 꽃, 꽃의 여왕하면 장미!”
하루노 유카. 친구들은 곧잘 그녀를 ‘하루카’라 부르며 봄에 피는 꽃에 비유하고는 했다. 봄 향기라고 했을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꽃이니까, 그러니 하루노는 꽃과 같다고, 꽃처럼 아름답노라고, 그중에서도 5월의 찬란한 봄에 만개하는 장미를 닮았노라고 친구들의 결론은 그러했다.
칭찬으로 하는 고마운 말이기에 그 말대로 꽃처럼 웃고 있는 하루노였지만 종종 듣는 그 말이 낯설기만 했다.
생기발랄한 10대 소녀들의 대화는 장미꽃 축제에서 금세 남자친구 이야기로 이어졌다. 로즈 데이에 장미꽃을 선물할 사람이라면 역시 남자친구 아니겠냐는 것이다.
“근데 하루노는 진짜 남자친구 없어?”
“맞아. 우리 중에 제일 있을 것처럼 생겨서는!”
“아서라. 얘가 연애하려면 백년은 일러.”
“하긴, 그것도 그러네.”
“아아, 어서 남자친구 생기면 좋겠다!”
소녀들이 웃음을 터트리며 이야기를 나누던 곳은 별관과 이어지는 뒤뜰로 미술실 근처였다. 꽃잔디와 함께 5월에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우는 장미가 어우러져 담소를 나누기 좋은 공간이지만 의외로 학생들이 잘 모르는 곳이었다.
햇살 좋은 미술실에서 책을 읽던 데즈카는 어느 순간 유독 선명하게 들어오는 소리 하나에 귀를 기울였다. 발그레한 색으로 물들었을 것만 같은 목소리. ‘장미의 화려함보다는 작약의 고운 자태에 가깝지 않을까.’하고 떠오른 생각은 수업 시간을 알리는 예비종 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중학교 2학년의 봄, 봄 향기에 설레는 5월, 데즈카의 마음에 봄꽃 씨앗 하나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았다.
◇ ◇ ◇
“어제 그거 봤어?”
“역시 로망이지.”
“카즈키 군 진짜 멋있더라.”
“그치만―!”
‘눈을 피하긴 왜 피하냐며, 잘생긴 얼굴을 1초라도 더 봐야지!’라는 카나의 말에 다들 크게 웃어버렸다.
“맞아, 맞아. 게다가 이기면 소원도 들어주는데!”
“우리도 해볼까?”
“좋아! 진 사람이 매점 쏘기!”
유쾌한 내용만큼이나 맑은 웃음소리가 봄 햇살과 함께 학생회실에 들려왔다.
“후훗. 귀엽네.”
“음? 네가 더 귀엽다.”
“아, 밖에서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서. 다들 귀엽구나 싶네. 데즈카도 저 프로그램 봤어?”
“보지는 않았지만 우리 반에서도 이야기들 하더군.”
“역시 유행인가보다. 데즈카는 어때? 데즈카라면 백전백승일 것 같지만.”
“글쎄. 그건 잘 모르겠군.”
“시합에서는 상대의 눈을 피해본적 없지 않아?”
“시합이랑은 다르니까.”
“으음, 그런가…….”
“해보면 알겠지.”
말을 마친 데즈카는 하루노의 눈을 지그시 바라봤다.
“응? 지금? 나, 나랑?”
“누가 또 있나.”
“어, 응. 그렇지, 그렇긴 한데…….”
얼결에 시작된 눈 마주치기 게임에 당황한 하루노의 눈이 이리저리 방황하다 이내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렇게 갑자기 그러는 게 어딨어……. 반칙이야 데즈카.”
“다시 해도 상관없다만.”
“아니, 다시 해도 결과는 똑같을 거 같아……. 그래서 소원이 뭔데?”
데즈카가 이런 게임에 흥미를 가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뭔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소원을 물었다.
“유카.”
“……응?!”
“이름.”
“그러니까……, 쿠니미츠?”
데즈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하루노의 대답에 긍정했다.
“이름으로 부르는 게 데즈카 소원이야?”
“쿠니미츠.”
“아, 응. 아직 어색해서.”
아직 입에 익숙하지 않은 호칭에 하루노는 데즈카의 이름을 계속 중얼거렸고 덕분에 데즈카의 귀 끝이 빨갛게 변했지만 워낙 표정 변화가 없는 덕분에 하루노는 그 사실을 채 발견하지 못했다.
◇ ◇
“하루 쨔아아앙!”
“응, 응.”
“어떻게 고등부에서는 한 번을 같은 반이 되질 않는 거야! 심지어 멀어!”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만나는 줄 알겠다.”
“맞아, 하루노. 그거 계속 받아주면 버릇 나빠진다?”
“흥. 내 하루 쨩 탐내지 말아줄래?”
“뭐래.”
중등부에서 시작된 인연은 사토와 하루노를 중심으로 고등부까지 그대로 이어졌다. 의외라면 중등부에서는 반장을 도맡아 하고는 했던 사토가 고등부에서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오히려 하루노가 학생회에 들어간 점이었다.
“사토, 내년에도 학생회 안 할 거야?”
“으음, 좀 보고.”
“하루노는 할 테고 회장은 역시 데즈카 군이려나?”
현재 학생회에서 데즈카와 함께 활동 중인 하루노를 보며 아사미가 질문했다.
“응. 현재 선배들이 지지하는 것도 그렇고 쿠니미츠가 선거에 나갈 거 같아.”
“…….”
“역시.”
“드디어.”
“잠깐. 잠깐, 잠깐만 하루 쨩. 뭐? 쿠니미츠? 쿠니미츠으??”
언제부터 쿠니미츠였냐며, 내년에는 기필코 학생회에 들어가겠다며 사토는 한참 열을 내었고 다른 친구들은 친구 연애를 방해하는 거 아니라며 사토를 타박했다. 그러나 곧 하루노의 연애가 아니라며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경위를 듣고 난 후 친구들의 타박은 하루노를 향했다.
“아직도 사귀는 게 아니라고? 말도 안 돼!”
“맞아. 게다가 이름으로 부르면서? 사토도 아직 이름으로 안 부르는데.”
“아니 대체 내가 왜…….”
친구들이 구박하는 이유를 알 수 없는 하루노가 울상을 지었지만 그녀의 단짝인 사토도 이번만은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도리어 자신도 이름으로 불러달라며 칭얼거리는 사토에게 그러겠노라 대답하는 게 하루노의 최선이었다.
◇ ◇ ◇
* 눈 마주치기 게임
: 둘이 마주보고 서로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다가 한쪽이 부끄러워서 얼굴을 가리거나 돌리면 그 사람이 지는 게임. 서로 연인사이면 진 쪽이 이긴 쪽에게 키스해주고 친구 사이면 소원을 들어줘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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